선풍기에서 더운 바람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무지막지하게 더운 날씨를 빗댄 표현이다. 얼마나 더우면 선풍기 바람조차 더울까, 하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기온이 35도를 넘나들면 기와집의 방 안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무덥고 습기가 많은 날, 사나운 햇빛의 기세를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는 방 안에 있으면 땀이 줄줄 흘렀다. 건축 자재가 지금처럼 기후 친화적이지 않았고, 에어컨도 없었으니 방 안은 찜통더위가 따로 없었다.
온종일 밤낮을 선풍기 바람에 기대다 보니, 선풍기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모터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아침부터 햇빛에 달궈진 방 안 공기는 오후로 접어들면서 물먹은 솜처럼 끈적끈적해져 마침내 불쾌지수가 폭발하고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났다.
선풍기의 작동 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디자인이나 날개의 수, 형태, 바람의 강약 조절 등 기능 면에서는 몰라보게 진화했다.
#만만하지만, 여전히 유용한 부채
그럴 때 꺼내 드는 비장의 무기가 있는데 다름이 아닌 부채다. 알다시피 부채의 역사는 선풍기 이전,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풍기가 없던 시절에 태어난 부채는 선풍기가 대중화된 때에도 있었고, 에어컨이 대세인 지금도 있다. 부채는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부채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가며 꿋꿋하게 살아남을 훌륭한 바람의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손을 놀려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인 부채는 원시적이지만 가장 간편하고 언제,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한 유용한 아이디어 상품이다. 까마득한 옛날에 개발된 망치나 칼이 오늘날에도 여전한 쓸모를 발휘하듯이, 부채도 유효기간이 무한대인 보편적 생활용품이랄 수 있겠다.
멋스럽고 기품이 있는 접이식 한지 부채. 차르륵 펼치면 눈앞에 산수화가 나타나고 바람의 운치도 비할 데가 없어 부채 중 으뜸이라 할만하다.
#사람의 몸이 동력(動力)인 부채
부채가 바람을 일으키는 동력(動力)은 사람의 몸, 손동작이다. 외부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 친화적으로 찬바람을 생산하는 유일한 도구다. 부채가 내는 바람이 자연 바람인 이유다. 반면 선풍기는 전기와 모터, 날개로 바람을 생성한다. 에어컨은 전기와 모터, 압축기 팬과 냉매, 증발기로 실내 공기를 차게 만드는 냉방 장치다.
선풍기나 에어컨 모두 전기 에너지라는 외부 동력이 필수적이다. 선풍기나 에어컨이나 전기 에너지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선풍기와 에어컨의 바람은 인공적인 행위의 결과, 즉 기계 바람이다. 선풍기나 에어컨에 비하면 더위를 물리치는 효용성이 한참 뒤지지만, 아무리 더워도 부채 바람은 덥지 않았다.
세련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대나무 부챗살이 몸을 다 드러내면 공작새가 날개를 활짝 펼친 듯, 아름다운 기운이 느껴진다.
지금은 건전지가 동력인 휴대용 손 선풍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만, 내가 어릴 때 손 선풍기는 부채였다. 우리 집에도 부채가 여러 개 있었다. 길고 가늘게 쪼갠 대나무 살에 한지(韓紙)를 붙여 만든 부채는 여름철 필수 아이템이었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외출할 때 부채를 꼭 챙겼다.
접이식 한지 부채는 값이 비쌌다. 부채종이로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를 사용한 것은 종이 질이 질겨 내구성이 좋고 가벼워서였다. 대나무 살에 두꺼운 종이를 강력 접착제로 고정한 부채가 일반적이었다.
#접이식 한지 부채의 품격(品格)
옛날식 대나무 한지 부채는 지금도 있다. 한지 부채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손에 쥔 한지 부채를 좌, 우, 한 방향으로 힘차게 펼치면 차르륵, 소리가 나면서 움츠리고 있던 부채의 속살이 활짝 드러났다. 부채의 속살에는 대개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다.
한지 부채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도 있었고, 접었다 폈다, 하는 동작에서 나는 특유의 소리가 멋스러웠다. 개인적으로 한지 부채의 모양과 기품이 마음에 들어 우리 집에 꽤 여러 개를 보관하고 있다. 소장용이다.
속살을 감춘 접이식 한지 부채의 모습도 군더더기가 없이 정갈하다.
#아이들의 부채, 책받침
초등학교 때, 부채를 대신한 추억의 부채도 있었다. 당시 학생들 누구나 소지한 책받침이다. 연필로 글씨를 쓸 때 종이 밑에 받치는 책받침은 필수 학용품이자 더운 날 아이들의 요긴한 부채였다. 재질이 단단하면서 판판하고 얇은 직사각형 모양의 플라스틱판이라 부채로 쓰기에는 그만이었다.
짝꿍이나 반 친구들과 책받침으로 부채질 해주기 게임도 많이 했었다.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가려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부채질을 해주는 게임이었다. 한 번 이길 때마다 열 번 또는 다섯 번 부채질을 해주는 식이었다. 책받침 바람도 쐬고 놀이도 즐기는 추억의 내기였다.
초등학교 때 책받침은 부채 대용품으로 인기가 많았다.
책받침은 연필로 글씨를 썼던 초등학교 때 주로 사용했다. 볼펜이나 만년필이 필기도구였던 중고등학교 때는 갖고 다닌 기억이 별로 없다. 책받침 윗면에 센티미터 단위의 눈금이 그려져 있어 가끔 자 대용(代用)으로 쓰기는 한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 찬물에 적신 손수건은 잠시나마 더위를 가시게 한 고마운 존재였다.
#손수건의 또 다른 쓰임새
70년대는 학교생활의 규율(規律)이 엄격할 때라 수업 시간에 책받침으로 부채질할 수는 없었다. 그럴 때는 쉬는 시간마다 손수건에 찬물을 적셔 목덜미에 두르고 수업했는데, 더위도 가시고 졸음도 쫓고 정신도 맑아지는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가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내가 애용(愛用)한 방법이었다.
부채는 신라 시대에도 있었고, 50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부채는 만만한 물건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