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오디세이 ⑧약장수와 차력사(借力師)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남자
70년대 초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도중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집 근처 동네 공터를 지날 때쯤이었는데,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었고 안에서 연신 기합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집고 고개를 디밀어 보니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맨손으로 벽돌을 깨뜨리는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그 남자는 웃통을 벗고 있었는데, 울퉁불퉁한 근육이 남달라 보였다. 남자 옆에는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무어라 열심히 떠들면서 구경꾼들의 흥을 돋우고 있었다.
#길거리 행위 예술의 명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본 그 모습은 약장수와 차력사(借力師)가 2인 1조가 돼 신기한 묘기를 펼치는 장면이었는데 그들의 속셈이 검증되지 않은 약을 비싸게 파는 것이라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차력사가 훈련으로 단련된 몸으로 과시하는 무술(武術) 시범과 떠버리 약장수의 가짜 약 판매 선전 선동은 70년대에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행위 예술이었다.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를 지닌 차력사는 무술 고단자들이 구사하는 다양한 무술과 눈을 혹하게 하는 마술(魔術)로 구경꾼들을 불러 모았고, 약장수는 청산유수(靑山流水) 같은 말주변으로 차력 쇼의 분위기를 한껏 부추겼다.
심심풀이 공짜 눈요기나 할 요량으로 거리의 공연장을 찾은 구경꾼들은 차력 시범과 마술만 보고 가야지,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초심(初心)을 잃어버리고 아껴둔 쌈짓돈이나 얇은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곤 했다. 지갑을 여는 사람은 대개 나이 든 아주머니나 연로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지구촌에서 가장 힘이 센 괴력의 사나이를 뽑는 철인(鐵人) 대회 장면. ⓒInfoGibraltar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약장수의 현란한 말재주
구경꾼들의 초심인 돈 안 드는 눈 호강 결심이 무너지는 이유는 정신을 쏙 빼놓는 약장수의 뛰어난 언변 때문이었다. 현란한 말재주에 더해 능수능란한 할리우드 액션을 앞세운 약장수의 계산된 연기(演技) 앞에서 초로(初老)의 아주머니와 노인들은 정신 줄이 나가기 마련이었고 그것은 곧 약장수의 수입으로 연결됐다.
약장수의 수입은 이름 모를 약을 진짜라고 속이거나 약효를 과대 포장해 판매한 불로(不勞) 소득이나 다름없었다. 약장수는 흑심(黑心)을 드러내기 전에 뜸을 들이며 정해진 각본에 따른 요식 절차로 좌중의 분위기를 휘어잡았는데 그 역할은 차력사가 맡았다. 약장수와 차력사는 화창한 날 오후에 주로 동네 공터에 판을 깔고 거리 공연을 펼쳤다.
#차력사의 길거리 퍼포먼스
약장수와 차력사가 동네에 떴다, 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구경꾼의 유형은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공짜 공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이유와 무료한 오후 한때를 보내기에는 차력사의 길거리 퍼포먼스가 그만이라는 이유가 구경꾼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일 것이다.
차력사가 내보이는 차력 묘기는 다양했고, 볼만했다. 두 손으로 숟가락 구부리기, 손날로 각목을 부러뜨리고 맥주 병목 깨기, 주먹으로 송판이나 벽돌 깨기, 30개들이 날달걀 한 판을 바닥에 놓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기, 소형 트럭에 연결한 밧줄을 입에 물고 끌기, 웃통에 빙빙 둘러 묶은 철사 끊기, 작두날 위에 드러누운 다음 배 위에 얹은 벽돌을 망치로 내려치게 하기, 나무막대기를 배에 가격해 부러뜨리기 등이었다.
#차력술에 이은 마술 묘기
하나의 묘기가 끝날 때마다 박수갈채가 터졌고, 약장수는 있는 속담 없는 속담 다 끌어다가 구경꾼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바빴다. 차력사는 몇 가지 마술 연기도 선보였다. 입에 넣은 달걀을 등 뒤에서 꺼내기, 커다란 보자기를 펼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킨 뒤 몇 번 접기를 반복하다 상자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꺼내는 순간, 살아 있는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깜짝 쇼, 입 안에서 종이 노끈 뽑아내기, 불 솜뭉치 입에 넣고 끄기 따위였다.
#약장수의 시간과 사탕발림 카드
마술 묘기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 약장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능숙한 솜씨로 자신의 무대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약장수는 속사포 같은 입담으로 구경꾼들의 시선을 끌어온 다음 ‘지금부터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이라고 운을 떼며 사탕발림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약장수가 말로 구경꾼들을 홀리는 사탕발림 카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신통방통한 희귀한 묘약으로,
-오늘 딱 하루 여러분에게만 시중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특별 염가(廉價)로 판매하는,
-치통, 복통, 두통, 신경통, 근육통 모든 통증을 한 번에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으로써,
-약효가 없는 경우 즉각 환불(還拂) 조치해 드리며,
-20개만 한정 판매하니, 못 샀다 후회 말고 서둘러 구매하시기를…….
#바람잡이 아주머니
약장수는 미끼 상품인 구충제를 잔뜩 꺼내 들고 약을 사는 사람에게는 공짜로 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만성 신경통에 시달리는 노인들은 파격적으로 싼 가격이 구미가 당기면서도 살까 말까, 서로 눈치를 보다가 나이 지긋한 중년의 아주머니 한두 분이 아저씨 나 하나 줘요, 나도요, 하고 달려들자, 너나 할 것 없이 지갑을 열곤 했다.
중년의 아주머니는 약장수와 미리 입을 맞춘 바람잡이였는데, 차림새가 단정하고 행동거지(行動擧止)에서 진정성이 느껴져 노인들이 혹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생이 이런 약장수의 치밀한 각본을 알았을 리는 없고, 내 말을 들은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저간의 사정을 들려줬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약장수의 교묘한 낚싯밥에 걸려든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는데, 그들은 나중에 가짜 약인 것을 알고서 뒤늦게 후회하며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약장수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는 알 수가 없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약장수가 다시 나타날 리도 없으니, 약값을 돌려받을 일도 없을 것은 자명해 어리숙한 노인네들만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잦았다.
차력술과 마술 묘기를 공짜로 본 대가치고는 피해가 적지 않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애꿎은 노인들만 가슴앓이로 속을 끓인 어수룩한 시대상이 낳은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