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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기와집에서 겨울나기 ④군밤, 군고구마, 어묵탕

by 박인권

기와집에서 겨울나기 ④군밤, 군고구마, 어묵탕


#길고 지루했던 겨울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立冬)이 지나고 해가 짧아지면 밤의 인기척도 빨라졌다. 50년 전 70년대 초반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오후 5시를 넘어가면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면서 어둑어둑해졌다. 겨울밤이 고향 집에 머무는 시간은 길었고 지루했다.


찬 바람이 불고 고향 집 안방과 작은 방 윗목에 한기(寒氣)가 돌 무렵이면 형들과 내가 똑같이 떠올리는 먹거리가 있었다. 뜨끈뜨끈한 군밤과 군고구마, 길쭉한 오뎅과 무, 대파를 넣고 끓인 어묵탕인데 모두 추운 겨울밤을 견디게 하는 든든한 위로의 음식이자 간식거리였다.


밤이 일찍 찾아오는 겨울엔 저녁 식사 시간도 빨랐다. 초저녁에 밥상을 물리고 맞는 밤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밤이 이슥해질 즈음 일찌감치 뜬 밥술의 기운이 슬슬 풀어지면서 배에서 꼬르륵 신호가 울리면 형들과 나는 가위바위보를 했다. 꼴찌가 군밤과 군고구마를 사러 가야 했다. 군밤만 살 때도 있었고 군고구마만 살 때도 있었다.


종로3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군밤 노점(露店). 밤 굽는 방식도 옛날과 달리 가스를 동력으로 한 기계식이었다. ⓒPARK IN KWON


#군밤과 군고구마 사러 가기

겨울밤의 바깥 날씨는 추웠고, 바람은 매서웠다. 대문 밖을 나서면 몸이 덜덜 떨렸다. 군밤과 군고구마 장수는 동네 어귀 한길에 있었다. 집에서 한길까지는 150m 남짓으로 먼 거리는 아니지만 춥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해 한달음에 내달려 갔다 오곤 했다.


군밤과 군고구마는 한 명의 행상꾼이 같이 팔았는데, 굽는 방법이 달랐다. 군밤은 손수레 아래를 뚫어 설치한 연탄불 위에서 석쇠로 구웠고, 군고구마는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구멍 뚫린 원기둥 모양의 철판 속에 고구마를 잔뜩 집어넣고 장작불로 구웠다. 잡지 종이로 만든 봉지에 담은 군밤 한 봉지와 군고구마 한 봉지를 들고 집에 오자마자 간식 파티가 펼쳐졌다.


#군밤의 매력 포인트

겨울밤 별미(別味)인 군밤은 여러모로 매력덩어리였다. 툭 갈라져 벌어진 껍질은 뜨거웠지만 벗기기 쉬웠고 노르스름하게 익은 군밤 알갱이를 씹을 때 느껴지는 무르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식감에 금방 구운 고소한 향까지 입안에 더해져 먹을수록 입맛이 당겼다. 삶은 밤을 먹을 때 감수해야 하는 알갱이 부스러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군밤을 구우면 처음의 맨살이 도톰하게 부풀어 올라 알갱이가 탐스럽고 빛깔도 고와 시각적 임팩트도 뛰어났다. 과일과 달리 밤은 평소에 먹을 일이 별로 없고 특별한 때만 먹었다. 기제사(忌祭祀)나 명절 제사 때 음복(飮福)으로 먹는 생밤, 추석 연휴나 가을 운동회 때 먹는 삶은 밤, 겨울밤에 간식으로 먹는 군밤, 음력 정월 대보름 세시풍속인 부럼 깨물기용 밤 정도다. 먹는 때가 정해져 있고 먹는 방법도 다 다르다는 게 흥미로웠다.


형들과 군밤을 까먹다 보면 마음에 온기(溫氣)가 넘쳤고 잠시나마 추위를 잊을 수 있었다.


노점에서 파는 포장된 군밤 한 봉지를 사 집에 와 뜯어보니 씨알이 너무 작아 실망스러웠다. 도토리보다 조금 큰 군밤 9개에 3.000원이나 해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쯤 되면 상술(商術)이 아니라 사기(詐欺)가 아닐까. 살기가 어려웠어도 70년대 옛날 인심이 훨씬 더 훈훈했다. ⓒPARK IN KWON


#먹음직스러운 군고구마의 속살

껍질째 장작불로 구운 군고구마는 뜨거웠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군고구마 껍질을 벗기면 수확 후 한 번도 노출되지 않은 속살이 진노랑 빛깔로 드러났다. 장작불의 열기가 빚어낸 속살의 인상은 강렬했고 단숨에 시각을 자극하며 군침을 돌게 했다.


불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군고구마를 한 입 베물면 군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센 단맛이 입안에 가득 퍼지는데 그 여운이 길어 감칠맛이 돌았다. 군밤이 고소했다면 군고구마는 감미로웠다.


#김치를 올려 먹는 군고구마의 또 다른 맛의 세계

금방 구운 군고구마가 너무 뜨거워 껍질을 까기가 번거로울 때는 다른 방법으로 먹기도 했다. 군고구마를 양손에 쥐고 반으로 뚝 잘라 티스푼으로 파먹는 식이었다.


군고구마는 그냥 먹어도 맛있었지만, 시큼한 김치 한 조각을 올려 먹으면 또 다른 풍미(風味)가 느껴졌다. 군고구마 특유의 강한 단맛과 퍽퍽한 뒤끝을 김치의 짠맛과 매콤하고 아삭한 식감이 어루만져 더욱 편안한 맛의 세계를 음미할 수 있었다.


군고구마는 가끔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은 기억도 난다. 군고구마를 2개쯤 먹고 나면 속이 뜨뜻해지면서 포만감도 들어 겨울밤 간식으로는 그만이었다.


에어프라이어로 구운 군고구마. ⓒPARK IN KWON


#속을 따뜻하게 녹여준 어묵탕

매서운 추위를 잊게 해준 겨울밤 군것질거리로 어묵탕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릴 때 먹었던 어묵은 길쭉한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우리 집에서는 오뎅이라고 불렀다. 어묵탕은 어머니가 손수 끓였는데 멸치와 다시마로 우려낸 육수(肉水)에 여러 개의 어묵과 큼지막하게 썬 무, 대파, 후추가 들어갔다. 어묵탕은 오래 끓일수록 국물 맛이 개운해 속이 풀렸고 어묵의 몸집도 부풀어 올라 식욕을 돋웠다.


마트에서 파는 어묵과 무, 대파를 썰어 넣고 끓인 어묵탕. ⓒPARK IN KWON


젓가락으로 어묵 몸 가운데를 꾹 찔러 양념간장에 찍어 한 입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어묵탕의 국물은 뜨끈뜨끈하면서 시원해 속을 녹이는데 그만한 것이 없었다. 대나무 꼬챙이에 꽂아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파는 어묵이 옛날에 먹었던 어묵과 비슷한데 국물 맛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군밤과 군고구마는 요즘도 여전한 겨울철 길거리 간식으로 자주 볼 수 있고 어묵탕은 술안주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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