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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Feb 22. 2024

삶의 정거장에서

14. 창밖의 설국(雪國)

창밖의 설국(雪國)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하얀 눈의 세상이 펼쳐졌다. 어젯밤부터 뿌리기 시작한 눈발은 지치지 않고 하강(下降) 낙하를 계속해 눈앞 풍경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베란다 밖 나뭇가지에 탐스럽게 핀 눈꽃이 바람에 흩날려 후드득 소리를 냈고 건물 지붕을 뒤덮은 백설(白雪)은 아침 햇살을 끌어안으며 밝게 빛났다. 밤새 지치지 않고 땅의 세계로 내려온 눈의 행렬이 빚어낸 설국 축제였다.     


 베란다 창가에 서서 천천히 눈 덮인 경치를 감상하던 중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 소환됐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눈앞의 풍경으로 치환하면, 베란다 바깥으로 눈길을 돌리자, 눈의 세계가 들어왔다. 아침의 얼굴이 눈부셨다, 고 할까.     


소설의 배경인 1937년 일본 니가타현에도 많은 눈이 내렸을 것이고 오늘 아침 지금 이곳에도 많은 눈이 내렸다. 그때의 눈은 그때의 눈이고, 지금의 눈은 지금의 눈일 뿐이라 두 눈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파트 창밖으로 펼쳐진 새하얀 눈의 세상PARK IN KWON


#눈꽃 경연  

베란다 밑으로 줄지어 선 나무 대열의 머리 위에서 흰 눈꽃들이 입을 활짝 벌리고 반짝거렸다. 나무로 둘러싸여 겨우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는 놀이터 땅바닥에도 눈이 수북이 쌓여 바닥은 보이지 않고 눈만 보였다. 드문드문 발자국 몇 개만 눈에 띌 뿐이었다. 


놀이터 뒤 야산 언덕배기에서는 눈꽃들의 경연(慶宴)이 벌어져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베란다 왼쪽 너머의 중학교 체육관 지붕과 운동장에도 눈 세례가 쏟아졌다.          


 가까이에서 겨울눈의 민낯을 보고 싶었다. 아파트 뒤 지상 주차 공간 쪽으로 다가서자 언제나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측백나무 무리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순백(純白)의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두텁게 달라붙은 눈 뭉치가 떼를 지어 측백나무 잎사귀 위에 사이좋게 어울려 엎드린 형상이었다.     


측백나무 잎사귀 위에 떼 지어 사이좋게 엎드린 눈 뭉치 형상양 떼 같기도 하고 강아지 새끼 같기도 했다PARK IN KWON


#겨울눈의 민낯과 변화무쌍한 날씨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들이밀자, 눈 뭉치는 양 떼 같기도 했고 갓 태어난 강아지 새끼처럼 비치기도 했다. 눈에 들어온 그 형체는 그러나 머지않아 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흩날리며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어제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저녁 무렵부터 가는 눈발로 바뀌었다. 눈발의 조짐은 온순했고 사납게 돌변할 기미는 없었다. 밤이 이슥할 때쯤 진동모드 핸드폰이 요란스레 부르르 떨렸다. 대설주의보 재난 문자가 들어왔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날씨인 터라 재난 문자가 성가셨다. 새벽 한 시가 돼도 눈의 기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잠든 사이 나의 예상이 빗나간 사실을 이른 아침의 바깥 풍경이 말해주었다.     


일주일간 눈의 호사(豪奢)를 선물하고 홀연히 떠나간 동백꽃 한 송이PARK IN KWON


#떠나간 동백꽃

 안타깝게도 일주일 전 베란다 창가에 핀 동백꽃 한 송이는 거짓말처럼 송이째 떨어져 있었다. 예고된 광경이라지만 그날이 오늘일 줄은 몰랐다. 작은 화분 바로 옆에서 마지막 모습을 드러낸 동백 꽃잎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으나 이미 어제의 동백 꽃잎은 아닐 것이라 마음이 아렸다. 새벽 내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묵묵히 자신의 삶을 다했을 동백꽃 한 떨기는 말이 없었다.     


 일주일간 눈의 호사(豪奢)를 선물하고 홀연히 떠나간 동백꽃의 무운(武運)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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