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Olympia)
에두아르 마네(1832~1883)
19세기 서양미술 사조(思潮)는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사실주의가 저물고, 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순간적인 형태를 즉각적으로 포착하는 인상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820~1830년대 사진기의 발명으로 그림을 통한 재현 능력이 위기에 봉착한 시대적인 흐름과 맞물려 고개를 내민 인상주의 화풍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화가가 바로 마네다.
마네는 바탕색을 칠한 뒤 그 위에 물감을 덧칠하는 전통적인 회화 양식과 달리 처음에 그린 색을 그대로 살리는 ‘알라 프리마’(alla puima) 방식을 사용했다. ‘알라 프리마’는 단 한 번에 마무리, 처음에 그린 것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뜻의 이탈리아어다. 이 방식은 물감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어 나중에 쉽게 수정할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이 애용했다. 마네는 또 색채 구사에서 중간 톤을 없애 작품의 평면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추상미술의 출현에 기반이 되었다는 평가다. <두첸의 세계명화비밀탐사, 모니카 봄 두첸 지음, 김현우 옮김, 2002, 생각의 나무, p171~p172 참조>
에두아르 마네. ⓒNadar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마네는 1832년 프랑스 파리에서 법조인인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와 외교관의 딸인 어머니 외제니 데지레 푸르니에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마네는 법조인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공부 머리가 그렇고 그래 법대 대신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이마저도 낙방하는 바람에 본인이 원한 대로 미술의 길로 뛰어들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루브르박물관을 드나들며 자연스레 그림의 세계와 익숙해진 마네는 1850년 고전주의 화가인 토마 쿠튀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회화기법을 익혔다. 이 시기에 마네는 유럽 각국의 미술관을 찾아 렘브란트와 루벤스, 고야, 벨라스케스 등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화가로서의 내공을 쌓았다.
1863년, 31살의 마네는 프랑스 화단을 발칵 뒤집는다.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미술전인 살롱의 낙선작들을 전시하는 살롱 낙선 전에 내 건 한 점의 작품 때문이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울창한 숲속에서 양복 차림의 두 신사와 벌거벗은 여인이 앉아 있는 내용의 그림이다. 이 작품은 신화 속의 인물을 이상적인 미로 표현했던 종전의 여성 누드 통념을 깨뜨리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퇴폐적이고 저속하며 원근법을 무시하는 등 화가가 그린 그림인지 의심된다는 식의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혹평과 달리 살롱 심사위원들의 낙점을 받지 못한 젊은 화가들은 마네의 이 작품에 매료돼 마네 주변으로 모여들었으며 이들은 나중에 인상주의 사조를 이끄는 중심인물이 된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캔버스에 유화, 208 x 264.5cm, 1863, 오르세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2년 뒤인 1865년, 마네는 또 한 번 대형 사고를 쳤다. 살롱전에 그 유명한 ‘올랭피아’를 출품한 것이다. 이번에는 아예 창녀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비난의 파장은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때보다 훨씬 거셌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1538년에 제작한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올랭피아’는 알몸의 매춘부가 당당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림이다. 퇴폐, 저질, 외설 논란의 중심에 선 ‘올랭피아’에 대해 마네는 “본 대로 그린 것일 뿐”이라고 대꾸했지만, 관람객과 평론가들의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런 가운데 에밀 졸라와 보들레르는 당시 사회에 만연한 위선을 고발하기 위해 진부한 미술 양식을 타파하고 혁신적인 바람을 불러일으킨 선구자라고 마네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에드가 드가,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등 인상주의 미술의 주류를 형성하게 될 젊은 화가들도 마네의 열렬한 팬이었다.
1883년 4월, 마네는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매독 합병증으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고통 끝에 51살의 나이로 운명했다. 이듬해,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서 마네의 추모전이 개최됐다. 추모 전시의 도록 서문은 마네의 든든한 후원자 에밀 졸라가 썼다. 공교롭게도 추모전이 끝난 뒤부터 마네는 유명해졌고 그림 가격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30.5 x 190cm, 캔버스에 유채, 1863,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올랭피아
올랭피아는 마네가 1862년에 작업을 시작해 1863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이 그림의 크기는 세로 130.5cm, 가로 190cm로 인상파 미술로 유명한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소장 중이다. 성적으로 문란했던 당시 파리 상류 사회 남성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고발한 이 그림과 관련한 소장 경로는 상당히 흥미롭다.
마네가 죽은 지 7년이 지난 1890년, 마네와 친분이 두터웠던 클로드 모네는 ‘올랭피아’와 같은 걸작은 프랑스 예술의 위대한 자산이라며 앞장서서 정부 기증을 위한 모금 운동을 펼친다. 마네의 미망인이 보관 중이던 그림은 이렇게 해서 뤽상부르미술관으로 옮겨진 뒤 1907년 루브르박물관, 1947년 주 드 폼 국립미술관을 거쳐 1986년부터 오르세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1865년 작품 공개 당시 외설 논란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이 작품의 실제 모델은 빅토린 무랑. 그녀는 화가들의 모델로도 활동했던 매춘부였다. 하얀색의 침대 시트와 칙칙한 검은색 톤의 배경이 서로를 떠미는 강렬한 색의 대비가 돋보이는 이 작품에서 마네는 그림 속 여인이 매춘부라는 사실을 다양한 장치를 통해 드러낸다. 여자의 성적인 욕망을 암시하는 머리에 장식된 꽃을 시작으로 당시의 창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벨벳 끈 목걸이와 비단 슬리퍼에다 오른 손목의 팔찌까지.
이뿐 아니다. 흑인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은 방금 막 손님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며 꼬리를 빳빳하게 말아 올린 검은 고양이는 남성성의 상징이다. 당시의 매춘부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름인 올랭피아를 작품 제목으로 정한 점과 마른 체형의 매춘부 선호 취향을 그림에 그대로 반영한 점, 관객이 그림 속 여인을 보는 게 아니라 거꾸로 여인이 우리를 보는 것 같은 도발적인 시선, 크게 벌린 왼손 엄지와 검지의 간격을 통해 육감적인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드러낸 점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