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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Jan 06. 2025

삶의 정거장에서

19. 달력 연하장(年賀狀)

19. 달력 연하장(年賀狀)     


#뜻밖의 선물

 새해 초,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보낸 이는 대학 친구, 선물의 내용은 탁상용 달력. 달력이 손상되지 않게 비닐을 씌운 겉면에 검정 네임펜으로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새해 福 많이, 더욱더 건강하게, 책도 많이 팔고”     


손 글씨로 직접 써 내려간 덕담(德談)의 필체가 유려했고, 대수롭지 않게 만은 볼 수 없는 감수성을 시적(詩的) 운율(韻律)에 담아낸 배려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따뜻해졌다. 지난해 초여름 출간한 하찮은 자전적 수필집의 성취를 격려하는 친구의 마지막 문구는 스산한 시대의 꺼림칙한 뒤끝을 지우고도 남았다. 오랜만에 보는 손 글씨의 순박하고 싱그러운 자태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 추억을 불러 세웠다.      


대학 친구가 자신의 그림을 인쇄해 제작한 탁상용 달력 겉면에 씌운 비닐 위에 쓴 덕담(德談문구.


#연하장과 연하 카드의 추억

새해를 축하하는 글이나 그림을 담은 편지 또는 카드인 연하장과 연하 카드. 연하장과 연하 카드를 주고받는 게 연례행사인 때가 있었다. 초중고등학교 시절, 연말은 연하장과 연하 카드의 시즌이었다. 다가오는 새해를 맞아 단짝 친구에게 보낼 편지와 카드를 준비하는 시간은 그리움과 설렘으로 가득했다. 편지지나 카드 속 백지(白紙) 위에 청춘들만의 우정의 속내를 한 글자씩 정성껏 손으로 새기는 일은 즐겁고 행복했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자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서로의 애틋한 마음이 깃들어 있었고 쓰는 사람은 쓰는 사람대로, 읽는 사람은 읽는 사람대로 낭만적 정취에 흠뻑 빠졌다. 밤새워 쓰고 만든 연하장과 연하 카드를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을 때의 성취감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공간, 116x91cm, 수채화, 2024. 지난해 경기미술대전 입선작이다


연하장을 보내고 받는 행위 자체가 문학적 감흥에 빠질 수 있는 축제의 장(場)이라 연말, 연초면 누구나 들뜬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도 존재감이 없지 않은 모나미 볼펜에 기대어 형형색색으로 꾸민 활자의 향연(饗宴)을 펼친다거나 이때를 기다리며 갈고닦은 감춰둔 그림 솜씨를 드러내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성(異性)에 대한 탐구 욕망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라 남몰래 연정(戀情)을 품어온 상대에게 마침내 용기를 내 고백의 편지를 띄우는 것도 연말 연초에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손 편지는 시간을 앞지를 일 없이 더디게 흘러가는 아날로그 시대의 동반자였다. 손 편지를 쓰는 동안만큼은 모두가 문학소년, 소녀였고 치기(稚氣) 어린 철학적 상념에 흠뻑 젖었다.      


몬드리안 서가, 91x116cm, 수채화, 2024, 


#친구의 그림 달력

 친구가 보내온 달력 이면(裏面)에는 직접 그렸다는 그림이 인쇄돼 있었다. 달력 표지를 포함해 모두 13개의 그림 하나하나가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그림을 보는 안목(眼目)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친구가 그린 달력 그림의 종류는 풍경과 정물, 인물을 중심으로 기하학적 구도에 맞춘 평면화도 눈에 띄었고 유화와 수채화, 아크릴화가 섞여 있어 다양한 제작 기법을 시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점을 빼고는 모두 2024년에 그린 것인데 지난 한 해 동안 창작에 몰두하느라 어지간히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 중에 미술 공모전 입상작도 여럿 확인돼 새삼 친구의 예술적 재능이 달리 보였다. 


한두 해 전, 우연히 친구가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선 적잖이 놀랐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술적 성취와 성공 여부를 떠나 문학과 음악, 운동과 마찬가지로 미술도 일정 부분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친구의 몸속에는 분명 미술적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일출, 35x25cm, 유화, 2024.


직업상 화가들을 만날 일이 많았다. 내가 만난 화가들은 한결같이 글쓰기가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전시 팸플릿이나 도록에 수록되는 작가 노트는 작가가 손수 쓰는 글이다. 화가들에게도 나름의 글쓰기가 필요한 셈인데 전시 때마다 작가 노트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고 한다. 


달력을 보내준 친구는 어떨까, 궁금했으나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달력 겉면 비닐 위에 쓴 간단명료한 세 문구는 글쓰기에 대한 친구의 감각적 재질을 보여주는 작은 징표가 아닐까, 싶다. 인터넷과 SNS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다. 눈 깜짝할 새에 오늘의 정보가 어제의 정보가 되고 유행과 흐름이 순식간에 바뀌고 변한다. 그럴수록 손 편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더욱 그리워진다.      


작별, 116x80cm, 수채화, 2023. 지난해 세계 평화미술대전 특선작.


#인생 2막에 들어선 친구의 취미

 친구는 어릴 때 막내 삼촌의 화첩(畫帖)을 보고 그림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이때부터 심심풀이 삼아 종이 위에 연필로 뭔가를 끄적거리는 버릇이 습관이 됐지만 정식으로 실기 지도를 받은 적은 없다고 했다. 굳이 말하자면 입사 초창기 때 홍대 앞 화실(畫室)에서 한 달 보름간 데생을 공부한 것이 전부라면 전부라고 들려주었다.     


몇 년 전 정년퇴직한 뒤부터는 그림 애호가들이 다니는 화실에 일주일에 2~3회 나간다고 한다. 나의 조바심과 달리 친구는 쑥스러워서인지, 끝내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꿈이 꿈처럼 꾸어지지 않듯, 친구도 인생 2막에 들어선 이제야 오매불망 그리워한 그림의 문턱에 섰을 것이다. 숱한 화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한 나는 잘 안다. 그림의 세계가 얼마나 지난하고 오묘하고 신비로운지를. 


 나에게 그림 달력을 선물한 친구가 그동안 품어온 꿈을 마음껏 펼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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