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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거장에서

22. 생일 선물

by 박인권

22. 생일 선물


#딸의 카카오톡 메시지

동이 트기에는 아직 이른 한겨울 새벽, 불쑥 들이닥친 요의(尿意)에 잠이 깼다. 한밤중의 요의는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생리현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칫하면 잠을 달아나게 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만드는 성가신 불청객이다. 드물지 않게 한 번씩 그런 일이 일어난다. 이날도 그런 날이었는데 사정이 달랐다.


한밤의 정적(靜寂)을 깨뜨릴라 조심스레 다시 자리에 누우려는 순간, 스마트폰의 불빛이 반짝거렸다. 가족 단톡방에 알림 소식이 뜬 것이다. 딸이 보내온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딸은 해가 뜨려면 한참이나 남은 시간에 아빠, 생일 축하해. 항상 감사하고 사랑한다며 카카오 페이로 축하금을 송금했다. 하트 무늬를 뿅뿅 날리는 이모티콘이 귀엽고 깜찍해 몇 번이나 보고 또 봤다. 잠기운이 저만치 달아났고 이윽고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잠이 모자랐으나 정신은 맑았다.


#카카오 페이 축하금

오전에 집사람도 카카오톡으로 생일 축하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꽃바구니에서 느닷없이 갓난아기가 불쑥 튀어나와 깜짝 놀랐는데 보면 볼수록 기발한 발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날 오후 아들도 생일 축하 메시지와 함께 축하금을 보내왔다. 역시 카카오 페이 송금 기능을 통해서였다. 그러고 보면 아들과 딸처럼 젊은 세대들에게 카카오 페이는 친숙하고 편리한 지불수단일 것 같다. 디지털 세대답게 빠르게 진화하는 정보 기술에 대한 적응 속도가 아날로그 세대인 부모 그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벌써부터 아들과 딸은 집사람과 나에게 송금할 일이 있으면 꼭 카카오 페이를 이용해 왔다. 맨 처음 카카오 페이 송금 메시지를 받았을 때가 기억난다. 재작년 아들이 취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말로만 듣던 카카오 페이 송금 봉투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전송됐는데, 다루는 방법을 몰라 한참 동안 혼자 씨름했었다. 한편으로 간편하고 세련된 송금 방식이라는 생각과 함께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 맞물렸는데 아직도 후자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


#현금의 물성(物性)

그것은 현금이라는 물성(物性)의 촉감이 유발하는 실존적 가치와 시각적 정취를 선호하는 개인적 취향 때문이다. 단지 아날로그 세대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디지털 시대의 창의적 산물에서 한발 비켜서 있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세대와 신세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잣대는 퇴행적이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돈의 물성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으로 현금(現金)보다 우월한 것이 있을까. 촉각적이고 시각적이면서 후각적인 매력에 더해 심리적인 만족감까지 안기는 현금의 특성은 돈의 화폐적 가치를 명징(明徵)하게 드러내는 눈앞의 실물(實物)이라는 데에 있을 것이다. 아들과 딸은 모를 것이다. 가죽 지갑이 지폐(紙幣)로 가득 찼을 때의 그 뿌듯함을.


현금으로 예(禮)를 표하는 대표적인 의식(儀式) 공간인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의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예전처럼 축의금과 부의금 봉투 풍습이 여전하나 어느새 계좌이체 방식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된 듯하다.


#어머니가 남긴 용돈 봉투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두 달에 한 번 고향집을 찾았다. 노년(老年)의 쓸쓸함을 달래는 말동무도 되들일 겸, 혼자서는 결코 드실 일이 없는 맛있는 음식도 대접할 겸, 해서였다. 그때마다 용돈으로 쓰시라며 봉투에 현금을 담아 건네면 어머니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다가도 마지못해 펑퍼짐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곤 했다.


아들의 성화에 떠밀려 봉투를 손에 쥔 어머니의 반응은 늘 똑같았다. 처음에는 미안해하던 낯빛이 이내 고마운 눈빛으로 슬그머니 바뀌는가 싶다가 보일락 말락 한 엷은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내 눈에 비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며칠 뒤, 안방 장롱 속 서랍에서 뜯지도 않은 여러 개의 봉투를 발견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금세 알아채고선, 주인 잃은 봉투를 집어 들고 한참 울었다. 어머니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생일날, 아버지는 종합선물 과자 세트를 사 들고 귀가했다. 1970년대에 과자 종합세트는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풍선껌과 사탕, 비스킷, 캐러멜, 빵, 초콜릿, 양갱(羊羹) 따위의 평소에는 먹을 수 없는 탐스러운 과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딸은 2010년대 초중반 중학생이었다. 생일날 저녁이면 딸은 가슴팍에 뭔가를 한 아름 안고서 집에 왔다. 친구들이 생일을 축하한다며 주었을 마음의 선물들이 예쁜 포장지에 싸여 있었고, 눈길을 끄는 또 다른 물건이 보였다. 그것은 신문지 크기의 노란색 보드지였다.


보드지 위에는 사인펜과 볼펜으로 써 내려간 생일 축하 메시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필체도 다르고 내용도 다 달랐지만 하나같이 개성적이면서 유머러스하고 깜찍한 문구들이라 여중생 특유의 발랄한 끼를 엿볼 수 있었다. 오래전이라 내용을 되살릴 순 없지만 딸 몰래 메시지를 훔쳐보며 혼자 키득거렸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기이한 삼겹살집 풍경

엊그저께 생일날 저녁, 집사람과 함께 동네 음식점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맛이 괜찮아 연말에 이어 두 번째 방문한 식당이다. 첫 번째는 빈자리가 없었는데 이날은 손님이 몰릴 시간이었는데도 숯불이 세 테이블에서만 타올라 의아했다. 시절이 수상하니 별 희한한 일도 다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집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값을 다 치른 뒤 기어이 호기심이 내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나) : 어쩐 일인가요.

(주인) : 일요일이라 그런가 봐요.

(나) : 네?


시절의 수상함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인지, 어리둥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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