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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거장에서

23. 죽은 자의 살아 있을 때의 사진 앞에 서면

by 박인권

23. 죽은 자의 살아 있을 때의 사진 앞에 서면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 한 장

어제, 스마트폰 앨범에 저장해 보관 중인 사진을 훑어보았다. 집 안 청소를 하듯,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한 사진에서 눈길이 멈췄다. 홀연히 아버지를 떠나보낸 어머니를 모시고 경상북도 청도 운문사(雲門寺)를 찾았을 때 찍은 사진이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비구니 수행 도량(道場)인 운문사는 한자 이름처럼 경내(境內) 풍광(風光)이 서정적이고 예스럽다. 구름(雲)이 드나드는 문(門), 이름만으로도 사찰의 분위기가 짐작된다. 어머니는 사찰을 좋아했다. 불교 신자이기도 했고 사찰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 속에서 속세에 찌든 어지러운 마음을 다독일 수 있어서라고 나에게 들려주었다.


운문사는 청도 시내에서 가까운 호거산(虎踞山) 자락 아래 평지에 터를 잡아 힘들이지 않고 방문할 수 있는 정갈한 사찰이다. 호거산은 호랑이가 웅크린 산이라는 뜻인데 호랑이가 운문사를 품은 형국(形局)인 셈이라 이보다 나은 수호신(守護神)이 있을 수 없다.


절 입구로 들어가는 1.4km의 진입로에 우거진 노송(老松) 숲 풍경이 장관(壯觀)이다. 이후로도 운문사에 몇 번 더 갔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수령(樹齡) 500년의 ‘운문사 처진 소나무’를 오래 쳐다보곤 했다. 사찰의 앞뜰에 둥지를 튼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진 희귀한 모습이라 붙은 이름이다.


삶의 정거장에서 23-1. 아버지와 어머니가 30대 초중반일 때의 모습. 20160327_204117.jpg

아버지와 어머니가 30대 초중반일 때의 모습.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

20년 전 어머니의 사진은 죽은 자의 살아 있을 때의 사진이다. 죽은 자의 살아 있을 때의 사진 앞에 섰을 때의 감정은 본능적인 그리움이다. 사진 속에서 죽은 자는 산 자가 되어 현실의 산 자에게 말을 건다. 죽은 자는 이미 죽은 몸이라 말할 수 없건만, 사진 속에서는 늘 살아 있으니 그러하다. 그리하여 산 자는 이미 죽었지만 살아 있는 자에게, 살아 있지만 애당초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오랜만이라며 반가워한다.


그 순간, 시간은 추억의 날개를 달고 과거로 날아간다. 죽은 자의 살아 있을 때의 사진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 때문이다. 죽은 자와 산 자와의 불가능한 대화는 이렇게 해서 가능한 것이 된다. 사진 속 죽은 자는 웃고 있고, 산 자도 엷은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한다.


20년보다 세월을 한참 거슬러 어머니와 아버지의 30대 때의 사진도 눈에 띄었다. 이미 고인(故人)이 된 지 오래지만 사진 속 두 분의 모습이 천륜지정(天倫之情)을 깨어나게 한다.


사진은 찰나를 기록한 그때의 정지된 흔적이다. 사진이 증명하는 자취가 시간에 속박받지 않고 영원히 자유로운 이유다. 사진이라는 물질성(物質性)은 빛이 바랠지언정 사진 속 인물의 모습은 순간적 포착을 광학적(光學的)으로 박제한 것이라 언제나 그대로다. 그래서 사진 속 인물의 힘은 강렬하고 비장한 구심력(求心力)의 다른 이름이다.


삶의 정거장에서 23-2. 내가 여섯 살 무렵, 어머니와 찍은 사진. 20160327_204544.jpg

내가 여섯 살 무렵, 어머니와 찍은 사진


#시절 인연과 제행무상(諸行無常)

불가(佛家)에서 유래된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시절 인연은 자연계의 섭리인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삶처럼, 인연도 만나서 시들고 병들어 마침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인연이 있다, 인연이 없다는 말도 시절 인연에 비추면 언어의 부질없는 형용(形容)에 불과하다.


불교의 중심 사상 중 하나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말도 있다. 우주 만물은 모두 늘 돌고 변할 수밖에 없어 한 모양으로 머무르지 않고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뜻이다. 사라져 없어지는 소멸 또한 돌고 변하는 대상이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영원하리라 집착하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줄여서 무상(無常)이라고도 한다.


결국 시절 인연이나 제행무상이나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고 영원하지 않아 스스로 구속해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중생(衆生)에게 시사(示唆)하는 불가(佛家)의 교리(敎理)이자 삶의 교훈(敎訓)일 것이다.


#윤회설

삶은 돌도 돈다는 불교 교리인 윤회설(輪廻設)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生)과 사(死)를 반복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니 절망할 필요도 없고 교만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라고 한다. 대중들이 참석한 해인사 법회(法會)에서 성철(性徹) 큰스님(1912~1993)은 욕심내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윤회를 시공간적으로 해석하면 누구라도 생(生)과 사(死)의 근원인 원의 둘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일진대, 원을 따라 한 바퀴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라 결국 돌고 변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 위의 출발점을 각자의 삶이라 여긴다면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견해는 일리가 있다.


삶의 정거장에서 23-3. 왼쪽부터 아버지와 나, 나보다 다섯 살 위인 큰형. 20160327_210306.jpg

왼쪽부터 아버지와 나, 나보다 다섯 살 위인 큰형.


#불생불멸(不生不滅)

성철(性徹) 큰스님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네 글자로 압축한 말이 불생불멸이라고 했다. 불생불멸은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을 262자로 축약한 경전(經典)인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불교 용어다. 사전적 정의로는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항상 그대로 변함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속뜻을 헤아리면 생(生)과 멸(滅), 유(有)와 무(無)는 현상과 대상의 일시적인 겉모습일 뿐, 우주 만물의 본질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라는 뜻이다.


태어나고 생기고 없어지고 사라진다는 것은 본질의 순간적 변형이지, 본질 자체는 영원히 본래의 모습을 유지한다는 불교 사상의 정수(精髓)가 바로 불생불멸이다. 그러니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소유와 상실 앞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말라는 뜻일진대 어리석은 중생들이 참뜻을 깨우치기에는 한없이 난망한 화두(話頭) 일 듯싶다.


#인생무상

덧없는 인생, 인생무상(人生無常)은 삶의 숙명적 유한성을 말하는 것이다. 종착점이 없는 억겁(億劫)의 세월에 견주면 인간의 삶은 찰나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인간이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거꾸로 탐욕과 통제 불능의 권력욕, 오만불손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이유이기도 해 인간의 삶은 모순투성이다.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는 장소가 장례식장이다. 고인(故人)의 영정(影幀) 앞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숙연한 감정은 고농축(高濃縮)된 인생무상의 무의식적 발현(發現)이 아닐까.


20년 전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내뱉은 가소로운 단상(斷想)이다. 을사년(乙巳年) 새해도 보름을 넘긴 오늘, 지인(知人)이 참척(慘慽)의 변(變)을 당했다. 슬픈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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