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몸이 보내는 신호
25. 몸이 보내는 신호
#병(病)의 징후
모든 병에는 징후(徵候)가 있다고 한다. 병이 생길 낌새인 징후는 우리 몸이 몸의 주인에게 병이 닥치기 전에 알아서 조심하라고 미리 보내는 용의주도한 신호다. 경험상 우리는 알고 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의 뜻을. 알고는 있지만 몸의 반응이 일러주는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살면서 누구나 흔하게 겪는 자기모순이다.
일상적인 병치레인 감기와 독감에서부터 당뇨, 뇌졸중, 뇌출혈, 심근경색, 치매, 관절염, 디스크 등 숱한 질환에 이르기까지 징후에서 자유로운 병은 없다. 예외도 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치명적인 악성 종양, 암(癌)의 징후는 아주 늦게 나타난다. 암은 징후의 의미가 무색하게 병세(病勢)가 상당히 진행한 후에야 우리 몸에 증세를 드러낸다. 불행한 일이다.
생명과학의 발달과 의료 기술의 혁신적인 개선은 암의 민낯을 밝힐 가능성을 느리지만 조금씩 높여가고 있다. 갈 길이 멀지만,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불치병(不治病)에서 난치병(難治病)으로의 방향 전환이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럼에도 암은 여전히 인류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초기 암이 아니라면 생존 확률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우리 몸 안에서는 끊임없이 세포 분열이 일어난다. 정상적인 세포의 분열은 생존을 위한 필연적 생명 현상이다. 정상 세포는 개체 수가 증가하는 세포 분열과 개체 수가 스스로 줄어드는 자연 소멸이 맞물리는 자정(自淨) 능력 덕분에 생명체의 균형 장치가 발동한다. 하나의 세포가 둘 이상의 세포로 나누어지는 분열 과정에서 오류 또는 착란 현상이 발생해 개체의 형질이 달라지는 마구잡이식 돌연변이가 축적된 결과 암세포가 출현한다. 악성 종양인 암세포가 면역세포의 견제 없이 체내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키운 암세포 덩어리가 암이다.
#정상 세포의 돌연변이, 암세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유전자의 특징이 변형되는 돌연변이 세포를 지닌다고 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다. 그렇다고 겁낼 일은 전혀 아니다. 의학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몸에서도 하루에 수천 개의 세포가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하지만 면역 기능을 담당하는 면역세포가 즉각 출동해 잠재적으로 인체를 좀먹을 수 있는 돌연변이 세포를 체포해 퇴치하기에 인체 시스템은 계속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돌연변이 세포가 증식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제어할 수 없는 또 다른 돌연변이를 반복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생성시킬 때 암세포가 등장한다. 암세포는 이때부터 죽지 않고 무자비하게 증식에 증식을 무한대로 거듭해 암 덩어리로 성장한다.
암세포는 노화(老化)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면역세포가 기능을 다하지 못하거나 고장날 때 무소불위의 왕성한 전투력을 앞세워 활동 영역을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확장한다. 증식 속도가 빠르고 증식 범위에 제한이 없다. 암에 관련된 흥미로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2012). 일본의 저명한 탐사보도 전문가 다치바나 다카시(1940~2021)가 2010년에 출간한 책이다.
2007년 방광암 수술을 받은 저자가 자신의 치료 경험과 심층 취재를 통해 3년 동안 암의 본질을 추적 연구한 역작(力作)이다. 우리나라에는 2012년 번역 출간됐다. 이 책에서 다치바나는 암세포의 생성 원인을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탐사보도 전문가 다치바나 다카시(1940~2021)가 암의 본질을 추적 연구한 역작,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 표지
‘암세포는 유전자가 착란을 일으킨 변이가 쌓여 엉뚱한 방향으로 진화한 괴물 같은 세포며 이미 출현한 암세포는 증식 과정에서 새로운 변이를 통해 보다 튼튼하게 성장한다.’
다치바나는 계속해서 ‘암은 항암제나 새로 개발한 치료용 신약(新藥)에도 즉각적인 약제내성 능력으로 맞서며 약효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암은 천의 얼굴을 한 악마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위의 책, 42p 참조)
암은 참으로 독한 성미의 질병이다. 불사조와 같은 무한 증식과 침투, 다른 신체 조직으로의 전이(轉移)를 제멋대로 하기 때문이다. 암세포는 자신을 숨기는 은폐 능력도 탁월해 정상 세포의 틈바구니에서 자유자재로 위장술을 펼친다. 암세포를 죽이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정상 세포가 희생당하는 이유다. 그러기에 본질적으로 암세포의 박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는 것이다. 항암 치료 환자의 머리숱이 사정없이 빠지는 것도 정상 세포의 손상이 원인이다.
#인체의 생태계가 시사하는 교훈
인체의 정상 세포는 분열하는 대신 자연 소멸을 통해 늘 일정한 개체 수를 유지하고 각자 생명 현상 유지에 필요한 고유의 기능을 수행한다. 정상 세포는 인체에 필요한 제 기능을 다하면 죽는다. 조화로운 타협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인체의 생태계가 신비로운 까닭이다.
그러나 암세포는 스스로 죽지 않는다. 개체 수의 자율 조정 기능과 본연의 역할이 없이 무제한으로 증식해 시간이 지날수록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세포 덩어리로 몸집을 불린다. 몸속의 쓸모없는 유해(有害) 세포 덩어리, 이것이 바로 암이다. 암세포의 유해성은 한발 더 나아가 정상 세포 속으로 뚫고 들어가 세력을 넓히는 침윤(浸潤)을 밥 먹듯이 하고 다른 인체 조직으로의 전이를 쉴 새 없이 시도한다는 데에 있다. 발견하기도 어렵고 치료하기도 어렵고 완치는 더 어렵다. 인체의 독버섯, 암은 이래서 무섭다.
#암이 무서운 또 다른 이유
암이 무서운 이유는 또 있다. 안타깝게도 암은 초기 단계에서는 특별한 증상이 없다. 다른 병과 달리 암은 병의 징후가 발동돼 몸이 느낄 때쯤이면 이미 손을 쓸 수 없거나 손을 쓰기가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암은 그 자체로 무서운 병이지만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더욱 인간을 괴롭힌다.
다치바나는 자신의 저서 236페이지에서 일반인들이 알면 깜짝 놀랄, 조기에 암을 감지할 수 없는 이유를 선명하게 설명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섬뜩한 내용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암은 증상이 없는 상태에서 자발적 검진을 받더라도 지름 1cm 크기의 암 덩어리로 자라고 나서야 맨눈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때의 암세포 숫자는 무려 10억 개에 이른다. 단 하나의 돌연변이 세포가 지름 1cm의 악성 종양 덩어리로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0~20년. 이전 단계에서는 암의 존재를 눈으로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인데,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검진 기술의 발달로 최근 들어서는 이보다 작은 크기의 암 덩어리도 찾아낼 수 있다지만 발견의 난해성이 여전한 것은 마찬가지다.
암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은 마치 투명 인간처럼 자신의 정체가 눈에 띄지 않도록 정상 세포 속에 숨어서 오랜 은둔 생활을 하며 장수하기 때문이다. 정상 세포를 은폐의 방패로 삼기에는 암 덩어리가 너무 커진 다음에야 비로소 베일에 가려 있던 암이 탄로 난다고 할 수 있다.
암은 또 완치가 어렵다. 안심해도 될 정도로 예후(豫後)가 좋고 의학적 소견(所見) 결과 완치라 확신할 만하더라도 어느 순간 재발할 수 있다. 암세포의 불멸성과 타고난 항체 적응력, 은폐 능력, 침윤과 전이라는 고유의 속성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만병(萬病)의 근원
엊그저께 점심때부터 몸이 찌뿌둥했다. 몸에 기운이 빠지고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렸다. 오한(惡寒), 기침, 콧물, 인후통, 몸살기는 없었다. 감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와는 달리 배설(排泄) 행위가 잦아서인지, 기력이 떨어지고 입맛도 없어졌다.
며칠 새 먹은 음식을 떠올렸다. 딱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다만 그럴 것이라고 짐작할 뿐, 장(腸) 속을 들추어보지 않은 바에야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도리가 없었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어서 몸을 편안하게 놀리기로 마음먹었다. 그제와 어젯밤, 나름의 방식대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나니 몸이 한결 나아졌다.
웬만해선 감기 따위의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 편이라 이유가 궁금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최근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심리적 긴장은 육체적 탈을 유발한다는데, 스스로 그럴듯한 결론을 내렸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따른 급성 과민 대장 증후군. 아파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안다고, 경미하더라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골골 팔십’이란 말이 있다. 잔병치레를 많이 할수록 오래 산다는 것인데 역설적이다. 지병(持病)으로 병원을 자주 찾게 되면 건강 관리에 그만큼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장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자질구레한 병에 오래 시달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트레스는 만병(萬病)의 근원이다. 피해 갈 수 없을 바에야 스트레스 관리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부질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인간의 삶이 인체의 생태계가 시사하는 교훈을 반의반에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