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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거장에서

26. 딸의 정신적 등불

by 박인권

26. 딸의 정신적 등불


#명절과 딸의 빈자리

일요일 밤늦게 딸이 왔다. 딸은 오늘부터 모레까지 휴무다. 설 당일은 근무라 미리 앞당겨 집에 온 셈이다. 지난 추석 때도 그랬다. 딸은 집에서 26km 떨어진 오피스텔에 산다. 출퇴근의 편의성 때문이다. 집을 떠나 지내면 그곳이 집이라고, 조금만 더 있다 가지, 속으로만 바랄 뿐, 딸이 떠나고 나면 늘 아쉬움의 잔상이 애잔함으로 남는다. 아들이라고 다를 바 없다.


하기야 내가 사회 초년병(初年兵)일 때도 그랬다. 부리나케 왔다가 바람처럼 가버리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도 못내 서운한 마음을 혼자 다독였을 것이다. 자식을 낳아 키워봐야 부모의 속뜻을 헤아릴 수 있다고,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는 후회막급일 뿐이라 부모에게 진 빚을 갚을 도리가 없다는 말은 세대를 불문하고 유효할 것이다. 그래서 자식은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에게 평생 자식일 뿐이지만, 부모는 죽는 날까지 자식에게 부모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딸은 근무하는 날과 쉬는 날이 그때그때 다르다. 일반적이지 않으나 알고 보면 딸과 비슷한 사례는 의외로 적지 않다. 분명한 점은 공적인 책무(責務)가 강조되는 직업일수록 그런 환경에 노출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쉽지 않은 길을 걷기로 한 딸의 선택이 못내 섭섭하면서도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갓 신입(新入)의 티를 벗어 진로 변경의 여지가 무한하게 열려 있는 딸이 지금의 길을 계속 걸을지, 또 다른 직업 세계의 문을 새롭게 두드릴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그 결정 또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삶의 주체인 딸의 몫이기에 마땅히 존중하고 응원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명절날, 가족이 다 모이는 자리에 딸의 빈자리가 덩그러니 남아 있는 모습에서는 어쩔 수 없이 허전한 심정이 남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불가피한 사정이라 그러려니, 하다가도 막상 딸의 부재를 마주하는 순간, 밀려오는 혈육의 정(情)이 본능적으로 감정을 다그쳐 벌어지는 일이다. 명절 차례(茶禮)를 지내는 우리집인지라 더욱 그렇다. 말이나 내색을 하지 않지만, 딸도 분명 그럴 것이다.


26-1. 딸의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국립대전현충원  20240919_153946.jpg

딸의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국립대전현충원


#딸의 정신적 버팀목, 친할머니

딸은 유난히 돌아가신 친할머니를 그리워한다. 딸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일과는 고단함의 연속이다. 밤낮으로 전쟁 치르듯 학업에 매달리느라 지치고 힘들 때마다 친할머니에게 기도하며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평상심을 되찾고 용기백배하도록 도와주는 수호천사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복된 일이다. 아무쪼록 딸에게 하늘나라의 친할머니가 앞으로도 삶의 고비, 고비에서 지혜의 손길을 내미는 단비 같은 희망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딸이 스스로 택한 기도의 대상이 왜 친할머니인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서였다. 딸은 친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손녀에 대한 친할머니의 사랑이야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딸은 친할머니에게서 부모와는 또 다르게 무한히 의지할 수 있는 푸근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희한한 점은 난관에 부딪히거나 큰일을 앞두고 있을 때마다 딸의 기도는 항상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딸은 집사람한테도 그런 말을 했고, 나한테도 그랬다. 수능 시험을 치르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나는 곁에 없어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친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딸의 말과 행동이 진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경험적으로 알아챘다.


수능 다음날, 딸이 나에게 말했다. 수시 면접이 끝나면 친할머니 산소에 가자고. 뜻밖이라 놀라기도 했고 대견하기도 해 뿌듯했다. 온 가족이 다 기뻐한 소식이 전해진 지 일주일 후인 그해 12월 19일 딸과 둘이 KTX를 타고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았다. 딸은 친할머니의 묘소에 소주 한 잔을 따라 올리고 예를 다해 엎드려 절했다. 두 번의 큰절을 올리는 동안 딸은 각고의 노력 끝에 탐스럽게 수확한 학업적 성취를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친할머니에게 전했을 것이다.


#겹경사의 행복

현충원 참배 일주일 전, 전철 안에 있던 나에게 집사람이 핸드폰으로 그 소식을 기별했을 때 보람과 환호가 꼭대기까지 치달아 하루 종일 구름 위에 올라탄 기분이 짜릿한 감정의 선율을 타고 오랫동안 벅찬 여운으로 남았다. 곧, 또 한 번의 경사(慶事)가 이어졌다. 등록금 고지서가 날아왔을 때, 과에서 한 명만 받는다는 전액 장학금 수혜자라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누나가 없는 나에게 친누나나 다름없는 사촌 누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잔치라도 벌였을 것이라고 거들었다. 딸은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경기도의 공립 외고를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다.


딸은 영문 첫 글자를 조합한 별칭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3개 대학에 지원해 야구의 3관왕을 일컫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그러나 대학 입시가 야구는 아니어서 하나의 타이틀만 취하고 두 개는 스스로 버릴 수밖에 없는 선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딸이 세 개의 타이틀을 모두 차지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해맑게 웃던 딸의 그때 그 표정은 대놓고 말로 표현하기에는 쑥스러울 수도 있을 성취감의 감격이 본능적으로 얼굴에 드러난 자긍심의 흔적이었다. 딸의 기억 창고에 영구 저장되어 있을 3관왕의 환희를 집사람과 나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틈틈이, 딸과 둘이 혹은 집사람과 셋이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을 참배한다. 딸은 친할머니의 산소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친할머니 곁에는 친할아버지도 나란히 누워 있지만 딸은 친할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딸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처음 간 것은 아주 오래전이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2년 12월, 딸은 그곳에 있었다. 기억의 회로가 아직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갇혀 있을 두 돌이 채 되기 전이라 딸이 그때를 기억할 리 없지만 거기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훗날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26-2. 딸이 좋아하는 엄마표 김밥 20250127_121331.jpg

딸이 좋아하는 엄마표 김밥


#딸의 독립

딸이 오피스텔로 독립한 뒤 집사람은 많이 서운해했다. 엄마로서 당연한 심정일 것이다. 딸의 부재를 처음 겪은 집사람은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고 했다. 있을 때는 몰랐는데 부대끼더라도 한집에서 같이 지낼 때가 좋았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집사람의 표정에서 품 안의 자식이란 말이 읽혔다.


집사람에게 나는 딸이 어디 도망간 것도 아닌데 마음을 비우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다독였으나 실은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말처럼 그게 쉽지 않다던 집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어느 순간 평상심을 되찾았다. 딸은 지지난해 5월부터 동소문동의 오피스텔에서 지내고 있다. 자식은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는 어렸을 때의 모습 그대로, 어린아이로 남아 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애틋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어머니도 그랬고, 집사람의 어머니인 장모도 그랬을 것이다.


딸은 청춘의 통과의례인 사춘기를 딴 세상 얘기인 양, 있는 듯 없는 듯 보냈다. 적어도 부모의 눈에 비친 겉모양이 그렇다는 것이라 고마운 일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내심(內心)으로는 나름의 속앓이를 적잖이 했을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을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스스로 친할머니에게 기대고자 했으니까.


26-3. 명절 때마다 집사람이 준비하는 갈비찜 20250128_092906.jpg

명절 때마다 집사람이 준비하는 한우 갈비찜


#다시 일상으로

딸이 집에 온 이튿날 늦은 아침, 집사람이 김밥을 쌌다. 딸이 김밥을 먹고 싶어 해서였다. 집밥을 그리워한 것도 있었을 테고, 집사람이 만든 김밥을 유달리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명절 음식으로 집사람이 늘 준비하는 한우 갈비찜도 딸은 오랜만에 먹었다.


딸은 하룻밤을 자고 설 전전날 밤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떠날 즈음에 오락가락하며 심술을 부리던 눈발도 사그라졌으나 언제 기습적인 변덕을 부릴까 몰라 콜택시를 불렀다. 집사람이 손수 모는 승용차 안에서 모녀(母女)가 눈 온 뒤의 질척한 겨울밤 거리를 달리며 40여 분 내내 둘만의 수다를 떨 기회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늦은 밤부터 눈은 다시 내리다가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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