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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거장에서

27. 자의식(自意識)과 자존감(自尊感)

by 박인권

27. 자의식(自意識)과 자존감(自尊感)


#친구의 조건

한 음절 단어 벗은 친구의 우리말이다. 자립적이고 분리적이라 그 자체로 성립하는 말의 최소 단위인 사전 속 낱말 벗이 일상의 용례로 살아남으려면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마음이 서로 통할 것, 그래서 가깝게 지내는 사이일 때 서로를 벗이라 부른다.


학창 시절의 친구는 나이가 비슷비슷한 또래의 무리를 일컫지만, 또래라고 다 친구일 수는 없다. 또래라는 막연하고 우연적인 시기적 일치성이 어떤 계기로 나와 동화(同化)될 때, 비로소 친구가 되는 법이다. 계기의 동화는 인연의 사다리를 타고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다리를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 친구나 벗이나 속내를 털어놓고 지내는 허물없는 사이라 할 수 있겠다.


무릇 인간관계가 다 그렇듯, 동갑내기 친구 사이가 지속적으로 순항하기 위해서는 상호 관용과 배려, 존중의 정신이 뒷받침돼야 한다. 상대에게 기울이는 관심과 열정이 식는다거나, 포용력이 삐걱거리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고 만다. 오랜 세월 우정의 가교(架橋)를 견인하며 영원할 것 같았던 죽마고우(竹馬故友)의 정리(情理)도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마는 일은 낯설지 않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상호 신뢰에 흠집을 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었는데도 철옹성이라 여겨온 우정의 성(城)이 거짓말처럼 허물어지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는 점이다. 아주 사소하고 하찮아 쌀겨에 묻은 먼지만도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아전인수식 그릇된 해석에 휘말려 걷잡을 수 없는 눈덩이로 불어난 나머지 스스로 심리적 잠금장치를 채워 등을 돌리고 마는 것이다.


나도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했는데 마음속의 궁금증은 여태껏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자의적(恣意的)으로 오랜 우호 관계에 석연찮은 빗장을 지른 상대도 나처럼 궁금증이 있을지, 모를 일이나 원래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지나쳐버렸다.


#10여 년 만에 재회(再會)한 친구

수수께끼 같은 그 일의 사례 중 하나의 발단은 이렇다.

2012년 1월 말쯤,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 나갔다. 잊을만하면 얼굴을 내비치던 동기 모임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친구를 보자 10여 년 전 전화기 너머로 별안간 들려온 기이한 말 한마디로 직격탄을 날리고 연락을 끊어버린 친구가 생각났다. 사회 초년병 시절 자취방(自炊房) 룸메이트이기도 한 둘은 학창 시절부터 각별한 사이로 소문난 단짝이었다.


이젠 섭섭함의 상처가 아물 때가 됐다 싶어, 지워버린 전화번호를 알아내 일주일 후 문자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공덕역 근처 일식집에서 10여 년 만에 이뤄진 재회의 자리에서 나는 그때의 일을 꺼내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짧지 않은 세월의 공백 탓에 서먹한 분위기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이내 옛정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친구가 건넨 명함에 인사 담당 본부장이라는 직함이 또렷이 박혀 있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친구는 임원급이라 올해 말, 임기가 끝나 옷을 벗는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난 같은 반 학우다. 대학은 달랐으나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지금은 없어진 대구백화점 뒤 막걸리 골목에서 버스 막차가 끊어지기 직전까지 질펀하게 취하곤 했었다. 1980년대 초 그곳은 권위주의적 시대상에 억눌린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친구와 밤새도록 막걸리잔을 부딪치며 청춘의 객기를 흥겹게 발산하던 취중에 느닷없이 싸늘한 말이 귓가를 스쳐 깜짝 놀라곤 했었다.


친구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남과 비교하는 일이 잦아 차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의아해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문제는 친구의 그런 버릇은 습관성이라 다른 친구들과의 자리에서도 노골적으로 꿈틀거렸는데 다들 귓등으로 흘려보내는 척했을 뿐, 스멀스멀 심중(心中)에 파고드는 찝찝한 마음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눈치들이었다.


오랫동안 그 친구를 만나온 나는 그것이 경로를 이탈한 과잉 경쟁심의 함정에 매몰돼 스스로 사고(思考)의 감옥에 갇힌 결과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자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성찰함으로써 앞으로 걸어갈 삶의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려는 자기 관용적 태도의 결핍이 유발한 안쓰러운 일이다.


친구는 자기의 말과 행동이 자존감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는 듯, 좌중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자존감은 스스로 품격을 지키고 자신만큼이나 남을 존중하는 마음이 우선될 때, 높아지는 법이다. 내면적으로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은 결코 남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존중받으려면 상대를 먼저 예우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과 비교하는 삶의 무상함

자존감이나 존재감은 재산이 많다거나, 많이 배웠거나, 겉만 번드르르, 하다고 해서 드러나지는 않는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겸손하고 과시욕이나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멀리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자존감은 겉치레가 없어 순수하고 그래서 아름답다.


절제되지 않고 정화되지 않은 현실 불만의 욕구는 분노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대개 자기 자신을 삶을 주체로 생각하기보다 매사 타인의 삶을 비교 대상으로 삼기에 스스로 불행해지는 모순에 빠진다. 상대가 자기보다 잘나 보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의 충동에 익숙하다. 열등감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불안정한 심리상태인 자격지심(自激之心)에 덜미를 잡혀 사소한 일에도 공격적이고 충동적이다.


자격지심이 습관이 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감추기 위해 말과 행동이 다르고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는데 상대의 눈에 금방 읽힌다는 것을 본인만 모른다. 마음의 양식(良識)이 빈곤해 편견과 오기로 가득 차 벌어진 일이다.


심리적 평화와 일상의 자족(自足)을 내적 충만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마치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듯 타인과의 비교 우위를 통해 구하고자 하는 것일진대 정신적 자해행위일 뿐이다. 남과 비교하는 삶은 자신에게 집중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스트레스만 안길 뿐이라 불행의 근원이 된다. 컵에 든 물이 반이나 남았다는 것과 컵에 든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상반된 해석은 산술적 판단 영역을 뛰어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문제다.


#자의식과잉의 대가

내가 보기에 친구는 자존감 대신 자의식(自意識)의 도가 지나쳐 자의식과잉에 빠진 경우다. 자기가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 실제와 괴리를 보일 때 나타나는 심리 현상이 자의식과잉인데 열등감과 강박감 증상을 유발한다. 현실 불만의 욕구가 좌절된 것을 참지 못해 세상을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판단해 벌어진 일이다. 자의식의 남용은 화(禍)를 자초하는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지만 자존감은 행운을 불러들이는 행복의 열쇠다. 자의식은 절제할수록 좋고, 자존감은 키울수록 좋다.


무릇, 모자라면 불편하나 넘치면 탈이 나는 법이다. 절제와 자제의 미덕(美德)은 그래서 선택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다. 우주의 질서이자 생태계의 법칙이 가르치는 가치다. 생각해 보라. 삶의 과녁을 내가 아닌, 상대에게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초라할지를. 나보다 재산이 더 많은 사람, 나보다 학벌이 더 좋은 사람, 나보다 잘난 사람을 인정하기 싫어해 현실 부정적인 삶을 사는 것만큼 무상한 것도 없다.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아집이 고착된다.


친구는 대기업 임원에서 물러나 지인(知人)의 도움으로 3년간 하청 회사에 다녔다. 운이 좋은 경우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친구는 더욱 폐쇄적으로 변해갔고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친구와 또 한 번 소원해지는 일이 일어났다. 주변 상황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화를 잘 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연락이 되질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와 카톡 메시지도 열어보지 않았다. 혹여 나로 인해 마음 상할 일이 없지는 않았는지, 몇 번이나 기억을 되돌아봤으나 그럴만한 사정은 발견할 수 없었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쨌거나 이거는 아니다 싶어 지난번 친구의 힘을 다시 빌렸다. 우여곡절 끝에 연락이 닿기는 했으나 만남이 예전만 같지가 않았다. 지난해 6월 또 다른 고교 동창의 아들 결혼식에 마땅히 나타나야 할 친구는 아무런 기별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날 이후로 감감무소식이다. 친한 친구 여럿이 연락을 시도했으나 모두 허탕을 치고 말았다. 다들 왜 그런 것인지 궁금해할 뿐, 도리가 없었다. 자존감이 자의식을 감싸는 삶을 멀리하고 자의식이 자존감을 삼켜 벌어진 업보(業報)일 것이라 스산했다.


얼마 전, 옛 직장 후배가 예순을 갓 넘긴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일이다. 삼가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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