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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공의 미학(美學)

축구 13. 법과 양심, 힘과 공감의 충돌

by 박인권

축구 13. 법과 양심, 힘과 공감의 충돌


#마법의 마자르인(The Magical Magyars)

아주 오래전, 월드컵 역사의 최대 이변 중 한 장면에 관한 이야기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 헝가리는 세계 축구계의 패권국(覇權國)이었다. 매직 마자르(The Magical Magyars)란 애칭으로 국제축구 무대를 호령하던 시절이었다. 매직 마자르는 마법의 마자르인, 마자르는 헝가리 민족의 조상인 마자르족을 말한다.


2년 전 헬싱키 올림픽에서 5전 전승(20골 2실점)으로 금메달을 딴 헝가리는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 이어 두 번째 월드컵 결승에 올라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준결승까지 4경기에서 25골을 터뜨리며 4전 전승, 게임당 6.25골이라는 막강한 공격력을 과시한 헝가리의 우승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A매치 32경기 연속 무패행진 중이던 헝가리에는 두 명의 걸출한 선수가 있었다. 푸스카스(1927~2006)와 콕시스(1929~1979), 1950년대 초중반 헝가리 축구의 황금시대를 이끈 쌍두마차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한 해 전의 헝가리 대표팀. 앞줄 가운데가 푸스카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콕시스. ⓒFOTO:FORTEPAN / Erky-Nagy Tibor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푸스카스

푸스카스(1927~2006)는 1950년대 세계 축구계의 톱스타였다. 네 차례 헝가리 리그 득점왕을 지낸 푸스카스는 1956년 헝가리 혁명 후 스페인으로 망명한 뒤 출장 정지 징계가 풀린 1958년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했다. 8시즌(1958~1966) 동안 유러피언컵(1992년부터 UEFA 챔피언스리그로 명칭 변경) 3회 우승(1958-1959, 1959-1960, 1965-1966), 라리가 5시즌 연속 우승(1960-1961, 1961-1962, 1962-1963, 1963-1964, 1964-1965), 라리가 득점왕 4회(1959-1960, 1960-1961, 1962-1963, 1963-1964), 유러피언컵 득점왕 2회(1959-1960, 1963-1964) 등 화려한 선수 생활을 보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262경기에 출전해 242골을 작성했다.


A매치 85경기에서 헝가리 역대 국가대표 최다 득점인 84골을 기록했다. 스페인 국가대표로도 4경기에 출전했다. 그의 업적을 기려 2009년 한 해 동안 가장 멋진 골의 주인공에게 시상하는 FIFA 푸스카스상이 제정됐다. 초대 수상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1985~). 우리나라의 손흥민이 2020년 수상자다.


#콕시스

푸스카스와 함께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주역인 콕시스는 스위스 월드컵 조별리그 첫 번째 경기 한국전 해트트릭에 이어 두 번째 경기 서독전에서는 4골을 터뜨리며 2경기 연속 해트트릭이라는 무시무시한 골 감각으로 집중 견제의 대상이었다. 준결승까지 4경기에서 11골을 기록한 콕시스는 결승에서 재대결한 서독전에서는 집중 마크에 막혀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그런데도 콕시스는 3명의 공동 2위 그룹(6골)을 5골 차로 따돌리고 스위스 월드컵 득점왕에 올랐다.


1956년 헝가리 혁명 후 스페인으로 망명해 1958년부터 1965년까지 FC바르셀로나에서 뛰었다. 헝가리 리그 4회 우승(1949, 1952, 1954, 1955), 라리가 2회 우승(1958-1959, 1959-1960). 헝가리 국가대표로는 68경기에서 75골을 기록했다.


1954년 7월 4일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베른의 방크도르프 슈타디온에는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2주 전 조별리그 헝가리전에서 주축 선수 5명을 후보로 대체해 의도적으로 정면 승부를 피한 제프 헤르베르거(1897~1977) 서독 감독은 3-8 참패 후 밧줄로 목을 매 참회하라는 악의에 찬 비난에 시달린 터라 배수의 진을 치고 결승전에 임했다. 베스트 멤버 총출동에 집요한 대인 방어에 역점을 둔 용병술과 역습 카드는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헝가리와 서독이 맞붙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불안한 조짐

서독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발목 부상으로 8강전과 준결승 두 경기에 결장한 푸스카스가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푸스카스는 경기에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 당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다. 전반 6분 페널티 박스 안에서 흘러나온 볼을 낚아챈 푸스카스가 선제골을 성공시켜 이름값을 했다. 2분 뒤 서독 수비수가 골키퍼에게 백패스 한 볼을 가로챈 치보르 졸탄(1929~1997)이 추가 골을 터뜨리자, 헝가리의 우승은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세상사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듯, 헝가리 감독 세베시 구스타브(1906~1986)의 작전 시나리오도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추가 실점 2분이 채 지나지 않아 서독은 추격 골을 넣은 데 이어 전반 18분 헬무트 란(1929~2003)이 동점 골을 터뜨리며 순식간에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헝가리의 파상 공세는 서독 골키퍼 토니 투렉(1919~1984)의 신들린 듯한 선방과 골대 징크스에 막힌 채 전반전이 끝났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헝가리와의 결승에서 눈부신 선방으로 우승에 기여를 한 서독 골키퍼 토니 투렉.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강해진 방패, 무뎌진 창

2-2 동점에서 시작한 후반. 서독의 방패는 예선전 때와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헝가리의 창은 예선전 때처럼 날카롭지 못했다. 서독은 아쉬울 게 없어 침착했고 헝가리는 못 이기면 망신이라 다급했다. 승부의 세계는 의외의 곳에서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법, 후반전 경기 양상이 그랬다. 평정심과 불굴의 투지로 똘똘 뭉친 서독의 수비는 견고했고, 마음만 급해 허둥대는 헝가리 선수들은 평소에 안 하던 실수를 남발해 공격 흐름이 자주 끊겼다. 서독의 수비벽은 예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끈적끈적했고 그것은 결국 반전(反轉)의 불씨를 살리는 불쏘시개로 효력을 발휘했다.


조별리그와 8강전에서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두 경기 연속 해트트릭 기록을 세운 콕시스는 서독의 찰거머리 맨투맨 방어에 고전했고, 후반 12분 골이라 확신한 헤더가 크로스바를 맞추는 등 운마저 헝가리를 외면했다.


#베른의 기적

후반 39분 동점 골의 주인공 서독의 헬무트 란이 회심의 중거리 슛으로 역전 골을 뽑아내자, 결승전 무대인 베른의 방크도르프 슈타디온에는 떠들썩한 응원 함성을 밀어낸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헝가리는 경기 종료 직전 푸스카스가 명중시킨 동점 골로 기사회생하는가 싶었으나 석연찮은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가물가물하던 우승의 꿈이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행운의 여신(女神)마저 헝가리의 편이 아니었다.


서독 대표팀 주장 프리츠 발터(1920~2002)가 스위스 월드컵 우승 트로피인 줄리메컵을 수상하고 있다.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주장 푸스카스는 선제골로 체면치레했다고 하기에는 특유의 몸놀림을 괴롭힌 발목 부상 후유증이 못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월드컵 역사상 최대 이변의 하나인 ‘베른의 기적’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헝가리 정부에서 미리 제작한 월드컵 우승 기념우표도 용도 폐기됐다.


서독 선수들은 결승에서 헝가리를 이길 줄 몰랐을 것이고, 헝가리 선수들은 결승에서 서독에 질 줄을 몰랐을 것이다. 헝가리가 서독전에서 기록한 2골은 준결승까지 기록한 게임당 평균 6.25골의 3분의 1 수준이다. 서독전 패배는 1950~1956년 사이 헝가리가 기록한 유일한 패배다. 헝가리 축구의 황금시대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이 터진 후 주력 선수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막을 내렸다.


반면, 모두의 예상을 깬 드라마 같은 서독의 월드컵 첫 우승은 2차 세계대전 후 전범국(戰犯國)이라는 실의에 빠진 자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은 정신적 기폭제가 됐다.


#뒤늦게 밝혀진 흑막(黑幕)

스위스 월드컵 후 어두운 사실 하나가 밝혀졌다. 결승전 하프 타임 때 서독 선수들이 금지 약물인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금지 약물 규정이 적용되기 전이라 제재할 방법이 없었지만, 도덕적인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메스암페타민이 서독 선수들의 경기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길이 없고, 당대 최강 헝가리의 월드컵 우승 예상은 빗나갔다. 뒷맛이 찜찜한 베른의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하던 때의 푸스카스(맨 앞). 1961-1962 유러피언컵(현 챔피언스리그) 유벤투스와의 8강전 장면이다. 푸스카스는 포르투갈 명문 벤피카와의 결승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으나 팀은 3-5로 져 준우승에 머물렀다.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렇게 보면 합법적이라고 다 공정한 것은 아니라거나 합법적인 것과 공정한 것은 다르다는 말은 참말이다. 법은 힘이고 양심은 공감이다. 현실에서 힘은 공감을 누를 수 있지만, 양심은 세상을 포용한다. 힘은 시대상과 제도의 산물이라 가변적이나 공감은 원초적인 덕성(德性)에 호소하는 것이라 한결같다. 삶도 어렵고 축구도 어렵다. 오래전에 죽은 헤르베르거 감독도, 그보다 나중에 죽은 서독 선수들도 이 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말에도 동감할 것이다.


정의 구현 최후의 보루(堡壘), 법은 사악함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법을 만들고 운용하고 그것에 기대 살아가는 인간 자체가 사악할 수 있어 현실 속의 법은 언제든지 흉측한 민낯을 드러낼 수 있다. 법이 필요한 이유이면서 법보다 양심이 우월한 이유다. 70년 전 월드컵 결승 후반전을 앞둔 서독 대표팀의 라커 룸에서도 법과 양심 사이에서 무언(無言)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삶도 어렵고 축구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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