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살림살이의 3대 이모(姨母)
29. 살림살이의 3대 이모(姨母)
#택배 상자 속 물건의 정체
며칠 전 휴일 아침, 현관문 앞에 큼지막한 택배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 속 물건의 덩치가 만만찮아 보였다. 상자 안 물건은 로봇청소기였다. 로봇이 청소하는 시대다. 세상이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졌다. 내가 어렸을 때 로봇은 만화에나 등장하는 상상 속의 산물이었다. 4차 산업 혁명의 시대에 상상은 더 이상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세계로 편입되는 파격적인 통로가 열린 것이다.
집사람은 로봇청소기가 배달된 날,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로봇청소기를 원격 조종할 전용 앱을 핸드폰에 설치하면서 이제 비로소 살림을 도와줄 3대 이모를 다 갖췄다면서 만족해했다. 살림살이의 3대 이모라는 표현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어렴풋이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궁금증을 눈치챈 집사람이 짐작대로 식기 세척기와 건조기, 로봇청소기를 언급했다. 인격체가 아닌 물건을 이모에 비유한 것은 이 세 가지 제품이야말로 가사 노동의 부담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주부들의 로망이자 집안 살림의 3대 도우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봇청소기가 그린 우리집 실내 지도. 빨간 실선으로 둘러쳐진 영역은 청소 금지 구역으로 설정된 공간이다.
#로봇청소기의 첫인상
세팅이 끝나고 첫 출격에 들어간 로봇청소기는 스스로 집안 지도를 그렸다. 거실과 방, 주방을 드나들면서 감지한 공간의 크기와 형태, 특징, 베란다와 주방, 화장실의 위치에 근거해 자신만의 설계도를 디자인한 것이다. 로봇청소기가 그린 집안 지도에서 청소 대상에서 제외할 구역을 설정해 청소 지도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주인의 몫이다. 예를 들어 화장실과 베란다, 현관문을 열면 나타나는 신발장 앞 바닥 등이 그런 곳이다. 청소 제외 구역은 로봇청소기가 아닌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공간이다. 청소 대상 구역은 필요에 따라 확대와 축소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일시적인 추가와 해제도 가능하다.
집사람은 로봇청소기가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집안 지도를 그릴 때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다는데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거실 화장실 입구에서 로봇청소기는 마치 탐문(探問)이라도 하듯이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를 몇 번이나 망설이다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서는 현명한 결정을 내리더라는 것이다. 집사람의 목격담을 듣고 있던 나는 귀가 쫑긋해지면서 이내 로봇청소기의 퇴각 결정은 인공지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이를테면 화장실 입구의 턱에 선 로봇청소기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고선, 센서에 포착된 반응에 따라 학습된 행동 요령을 찾아내 스스로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화장실 입구의 턱에서 자신의 진로를 조심스레 탐색하던 로봇청소기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 분명한 위험을 알아채고선 방어기제를 작동시킨 결과일 터이다. 그렇다면 방어기제의 추진체는 로봇청소기 앞에 달린 눈, 즉 사물을 탐지하는 레이더 역할을 하는 센서 기술일 것이고 구체적인 행동 지침의 출처는 내장된 정보 기억장치인 메모리 칩일 것이 분명했다.
청소에 열중인 로봇청소기. 거실에서 작은방으로 진입하기 위해 문턱에 올라탄 모습이다.
#로봇청소기 관찰기
로봇청소기가 청소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동작 하나하나가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회전과 좌우 이동, 직진과 후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먼지와 이물질 청소가 끝나면 물걸레질을 순차적으로 수행했다. 흡입 청소와 물걸레질 청소 중 하나만 선택 지정할 수도 있고 한꺼번에 작동시킬 수도 있었다. 신기한 점은 청소 도중에 물걸레가 더러워지면 로봇청소기의 집, 즉 본체 보관 장소인 독(dock)으로 돌아가 자동 세척 후 다시 청소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걸레 세척은 청소가 끝날 때까지 몇 차례나 반복했다.
화면 터치 방식이 아닌 음성 명령으로 로봇청소기를 작동시킬 수도 있다. 청소 단계에서 세척 등 주요 기능을 수행할 때마다 현재 상황을 알리는 음성 신호를 보내는 친절함도 잊지 않았다. 로봇청소기는 집안 공간 구석구석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휘젓고 다녔다. 청소 금지 구역을 잘도 건너뛰었고 화장실 입구에서는 알아서 방향을 틀었다. 거실과 방 사이의 문턱에 쉽게 올라탔고 소파와 침대, 수납장 아래의 틈새와 후미진 곳까지도 파고 들어가 꼼꼼하게 청소했다.
로봇청소기의 움직임은 청소 지도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청소를 마치면 독으로 복귀해 셀프 세척과 건조과정을 거친 다음 충전이 완료되면 전원이 꺼졌다. 강제로 청소를 중단시키더라도 미처 못다 한 업무를 용케 기억해 내 다음 청소 시 해내고야 말았다. 신통방통해 웃음이 났다.
로봇청소기의 집인 독(dock)에서 잠들어 있는 로봇청소기 본체.
#로봇청소기의 원리
별안간 로봇청소기의 원리가 궁금했다.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고 청소하고 세척하고 충전하는 로봇청소기 작동 원리의 핵심은 센서 체계라고 한다. 자율 주행 알고리즘의 비밀이 로봇청소기의 센서에 담겨 있다는 말이다. 로봇청소기의 센서는 모두 다섯 가지다. ▲실내 지도를 생성하는 라이다(LiDAR, Light Detection and Ranging) 센서, ▲장애물을 감지하는 적외선 센서, ▲추락을 방지하는 낙하 감지 센서, ▲충돌을 방지하는 충격 센서, ▲거리를 측정하는 초음파 센서. 로봇청소기의 원리는 인공지능에 기반한 다섯 가지 센서 기술을 이용한 자율 주행 알고리즘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로봇청소기는 먼지 및 이물질 흡입과 물걸레 청소 둘 다 척척 해낸다. 오랫동안 사람이 하던 빗자루질과 걸레질을 사람 대신 도맡아 수행한다. 기특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로봇청소기는 인공지능이 장착된 자동제어장치에 의해 움직인다. 인공지능의 위력이고 인공지능이 실생활에 구현된 결실이다.
로봇청소기 본체 앞에 보이는 센서.
#일상으로 편입된 인공지능
인공지능이 일상의 삶으로 이식(移植)된 결과는 놀랍다. 사람 대신 장애물을 탐지해 충돌과 추락을 방지하고 공간과 거리를 인식해 경로를 판단하며 청소할 구역을 알아서 설계하는 능력이 현실이 됐다. 인간의 영역인 줄만 알았던 탐지와 인식, 디자인 기능을 인공지능으로 대체한 로봇청소기의 등장은 가사(家事) 노동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주부들이 열광하는 까닭이다. 식기 세척기와 건조기에 이어 로봇청소기가 개발됨으로써 가사도우미 3종 세트가 완성된 셈이다.
식기 세척기와 건조기가 삶의 편의성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한 고마운 가전제품이라면 로봇청소기는 가사 노동의 최전선에서 비지땀을 흘리던 인간을 해방(解放)시킨 헌신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청소 시간과 노동력의 수고를 덜어주고 맞춤형 청소 형태를 설정할 수 있고 외출 중 원격 제어까지 가능하다지 않은가.
문득 허리 숙여 빗자루로 마루와 방을 쓸고 물걸레의 물기를 짜낸 다음 무릎을 꿇고 걸레질하던 때가 어른거린다. 모든 게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던 아날로그 시절, 빗자루질과 걸레질은 가사 노동의 정점(頂點)에 서 있었다. 집 안 청소는 손빨래와 설거지보다 훨씬 힘들고 고된 중노동이었다. 좋아진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