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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공의 미학(美學)

축구 16. 미네이랑의 비극

by 박인권

축구 16. 미네이랑의 비극


축구의 의외성이 연출하는 희한한 풍경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경기, 1950년 마라카낭의 비극과 함께 브라질 축구가 슬픔의 눈물을 흘린 날. 축구에 관한 한 브라질은 영원한 우승 후보다. 2014년 7월 8일은 축구로 날이 새고 축구로 날이 지는 축구의 나라 브라질 국민이 비통에 잠긴 날이다. 무려 7골이나 헌납하며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브라질 축구 사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참사, 미네이랑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2014년 여름 아주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축구의 나라 브라질 땅에서 브라질 축구가 역대급의 망신을 당한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축구에 관한 자부심의 끝판왕, 브라질 축구 대표팀이 영혼까지 탈탈 털린 이야기는 믿기 힘든 월드컵 흑역사로 박제됐다.


세계 축구 역사상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참사로 기록될 사건의 발단은 브라질 월드컵 준결승전이 열린 2014년 7월 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브라질 동남부 벨루오리존치의 미네이랑 스타디움에 운집한 5만 8천여 명의 관중들은 이날 오후 5시 홈팀 브라질과 독일과의 월드컵 준결승전이 킥오프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잠시 후 눈앞에 펼쳐질 거짓말 같은 광경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전 세계 팬들이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브라질 대표팀과 브라질 국민은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통산 여섯 번째 우승 트로피를 거머쥘 꿈에 들떠 한마음 한뜻으로 현장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있었다. 홈팀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 함성이 경기장을 뒤덮은 가운데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의 상징 색인 노란색 물결이 춤추듯 넘실대며 장관(壯觀)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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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브라질 월드컵 준결승 브라질-독일전이 열린 미네이랑 스타디움. 경기 시작 20분 전 모습이다. ⓒdronepicr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전반 30분 만에 불어닥친 몰락의 회오리

공수의 핵인 브라질의 세계적인 공격수 네이마르(1992~)와 당대 최고의 센터 백 치아구 시우바(1984~)가 각각 척추 부상과 경고 누적으로 이날 경기에 결장했지만, 전문가들은 박빙의 명승부를 예상했고 팬들의 기대도 그러했다. 그러나 축구의 의외성이 가혹한 실체를 드러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사불란한 브라질 응원단의 대오는 경기 시작 불과 11분 만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 코너킥 기회에서 독일의 토니 크로스가 낮게 올린 크로스를 뒤에서 파고들던 토마스 뮐러가 낚아채 그대로 골문을 갈랐다. 공간 포착 능력이 뛰어난 뮐러의 영리한 뒷공간 돌파를 브라질 수비수들이 따라잡지 못한 결과였다. 선제골을 허용한 브라질이 추격을 위해 공격의 고삐를 바짝 조이던 전반 23분 거꾸로 독일의 두 번째 골이 터졌다. 토니 크로스와 뮐러를 거쳐 연결된 패스를 36살의 베테랑 골잡이 미로슬라프 클로제(1978~)가 득점 본능을 발휘하며 골로 성공시켰다. 월드컵 개인 통산 최다 득점 신기록(16골)이 수립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슛이 브라질 골키퍼 줄리우 세자르(1979~)에게 막히자 재차 뛰어들어 기어코 골망을 뒤흔들고만 클로제의 특급 스트라이커다운 움직임이 돋보인 장면이었다. 전반 20분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의외로 연거푸 두 방을 얻어맞은 브라질 선수들이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불길한 조짐은 불과 1분 후 현실로 나타났다. 독일의 필립 람(1983~)이 빠른 속도로 브라질 오른쪽 진영으로 대시한 뒤 비어 있는 공간을 향해 찔러준 땅볼 크로스를 크로스가 논스톱으로 팀의 세 번째 골을 기록한 것이다. 경기 흐름은 독일 쪽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가뜩이나 불안한 브라질 수비진의 방어망은 급격하게 흔들렸다.


전반 26분 더욱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브라질의 킥오프로 재개된 경기에서 마음만 급한 브라질 중앙 미드필더 페르난지뉴(1985~)를 몰아붙여 공을 뺏은 크로스가 동료 사미 케디라(1987~)와 전광석화처럼 원투패스를 주고받아 승부에 쐐기를 박는 네 번째 골을 기록했다. 클로제의 골에 이어 크로스가 득점한 두 골 등 세 골은 3분이 채 되지 않은 순식간에 작성됐는데 이는 넋이 나간 브라질과 자신감에 날개를 단 독일의 대조적인 심리 상태가 오버랩되어 가시적으로 드러난 상징적인 장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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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의 준결승에 앞서 필승 각오를 다지고 있는 브라질 선수들. 이때만 해도 미네이랑의 비극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Agência Brasil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불명예스러운 기록들

탄력을 받을 대로 받은 독일은 전반 29분 메수트 외질(1988~)과 깔끔한 2대 1 패스 끝에 케디라가 팀의 다섯 번째 골을 터뜨렸다. 전반 30분도 되기 전에 5-0, 브라질 관중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처참한 모습에 경악의 눈물을 흘렸고 전 세계 팬들은 어리둥절해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었다. 승부는 이것으로 사실상 끝이 났다. 브라질은 우승은커녕 브라질 축구 사상 최악의 오명(汚名)과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다. 브라질은 0-7로 뒤지던 후반 종료 직전 오스카(1991~)가 넣은 골로 간신히 영패를 모면했다. 영원한 우승 후보인 브라질이 월드컵에서 7골을 내준 것은 당연히 처음이다.


브라질은 이날 패배로 온갖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뒤집어썼다.

▲월드컵 준결승 사상 최다 점수 차 패배, ▲월드컵 개최국 최다 점수 차 패배(이상 6점, 1-7), ▲월드컵 사상 최단 시간 4골 허용(6분, 전반 23분~전반 29분), ▲월드컵 사상 최단 시간 5골 허용(29분, 경기 시작~전반 29분), ▲브라질의 월드컵 최다 실점(7골), ▲1975년 코파 아메리카 칠레전 패배(1-3) 이후 39년 동안 이어진 62경기 홈 무패 행진(43승 19무) 마감, ▲역대 월드컵 4강 진출국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골 득실(7경기 11득점 14실점), ▲브라질 월드컵 32개 출전국 중 최다 실점(14실점)

경기 후 브라질 언론들은 브라질 축구가 사망한 국치일(國恥日)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브라질은 스페인과의 3, 4위 결정전에서도 0-3으로 무기력하게 졌다.


흥미로운 점은 브라질과 독일과의 경기 기록에서도 축구의 의외성이 감지된다는 것이다.

▲점유율(브라질 52%-48% 독일), ▲슈팅(브라질 18-14 독일), ▲유효 슈팅(브라질 8-10 독일), ▲코너킥(브라질 7-5 독일), ▲파울(브라질 11-14 독일)


16-3. 2014년 브라질 월드컵 홈팀 브라질과 독일과의 준결승 장면.jpg

2014년 브라질 월드컵 홈팀 브라질과 독일과의 준결승 장면. ⓒAgência Brasil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의미심장한 승부 세계의 속성

스포츠란 묘하다. 경기에 이긴 승인(勝因)은 복합적이고 경기에 진 패인(敗因)도 복합적이다. 승부의 요인은 단선적(單線的)이지 않고 유기적(有機的)이다. 어제의 승자(勝者)가 오늘의 패자(敗者)일 수 있고, 오늘의 패자가 내일의 승자일 수 있다. 브라질의 굴욕적 패배는 모든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 악몽일 것이고 독일의 예상 밖 압승(壓勝)은 모든 호재가 한꺼번에 겹쳐 폭발한 결실일 것이다. 브라질 선수들도 이날 경기 결과에 깜짝 놀랐을 것이고, 독일 선수들도 이날 경기 결과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브라질 선수들의 놀라움은 망연자실이고 독일 선수들의 놀라움은 환호작약이랄까.


결과론이지만 브라질의 악몽은 예선 때부터 낌새가 있었다. 개막전으로 치러진 크로아티아와의 조별리그 A조 경기에서 브라질의 왼쪽 풀백 마르셀루(1988~)는 전반 11분 자기 진영 페널티 박스 안에서 수비하던 중 굴절된 공이 발에 맞고 그대로 골문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대회 1호 골이자 황망한 자책골을 헌납했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세계적인 수비수 마르셀루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르셀루는 레알 마드리드 시절(2006~2022) 세계 최고의 왼쪽 풀백으로 이름을 날렸다. 마르셀루의 자책골 이전, 브라질은 한 번도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브라질이 3-1로 승리했으나 수비 스쿼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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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세리머니 중인 독일 선수들. ⓒAgência Brasil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복합적 패인

호사가들이 꼽은 미네이랑의 비극을 초래한 복합적 패인은 이렇다.


▲수비 조직력의 허점

▲네이마르의 부상(콜롬비아와의 8강전 후반 42분 브라질 공격의 전부나 다름없는 네이마르가 칠레 풀백 후안 카밀로 수니가의 무릎에 허리가 부딪히면서 전치 4주의 척추 골절 부상으로 실려 나가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

▲치아구 시우바의 결장과 리더의 부재(수비의 핵이자 팀의 리더인 주장 치아구 시우바가 8강전 후반 18분 콜롬비아 골키퍼에게 쓸데없는 반칙을 범해 경고 누적으로 준결승 출장 불가)

▲홈그라운드 프리미엄의 역풍(64년 전인 1950년 브라질에서 열린 월드컵 결선리그 우루과이전에서 역전패(1-2)해 우승을 놓친 마라카낭의 비극에 대한 강박감. 전 국민적 응원 열기와 자국 대회 우승을 향한 정치 사회적 압력)

▲우승에 대한 선수들의 과도한 심리적 압박감

▲수비수들의 무모한 공격 가담과 공격 일변도의 단조로운 전술

▲스트라이커의 부재

▲선수 선발을 둘러싼 잡음


대회 직후 경질된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1948~)은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7전 전승으로 브라질을 다섯 번째 월드컵 정상으로 이끌었던 터라 인간지사 새옹지마를 실감케 한다. 축구도 알 수 없고 인생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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