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17. 맨땅 축구
축구 17. 맨땅 축구
#동심(童心)의 해방구
축구공 하나만 있으면 하루 종일 즐거웠다. 학교 운동장에서도, 동네 골목길에서도 공놀이는 사시사철 흥겨운 오락거리였다. 모래 먼지 풀풀 날리는 맨땅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놀이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는 축구는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의 소일거리로 그만이었다. 축구 경기를 하는 동안은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고 그 시간만큼은 10살 안팎의 어린이들이 자기만의 공놀이 여행을 꿈꾸는 동심(童心)의 해방구였다. 축구는 아이들 누구나 손쉽게 즐길 수 있는 놀이문화이자 저마다 스포츠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청춘의 활력소였다.
축구는 곧 협동 정신과 사회성, 선의의 경쟁심 함양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끼를 마음껏 발산하면서 정서 발달과 체력 증진, 우정을 도모할 수 있는 삶의 축소판이었던 셈이다. 5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운동화가 귀하던 시절, 뒤축이 해지고 너덜너덜한 운동화를 신고 공을 차는 아이가 드물지 않았고 하얀 고무신 또는 검정 고무신을 신은 아이도 더러 있었고 검투사의 흉내를 내기라도 하듯, 아예 맨발로 운동장을 누비는 별난 아이도 없지 않았으나 공놀이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똑같았다. 언감생심 축구화는 딴 세상 이야기이던 때라 아주 가끔 그럴싸한 축구화를 신고 등장한 아이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우쭐댔다.
점심시간과 방과 후는 물론 수업 중간중간의 자투리 휴식 시간에도 공을 차는 아이들 모습이 흔했다. 화창한 날은 화창한 날대로,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날대로, 덥고 추운 날은 덥고 추운 날대로 아이들의 공놀이는 때를 가리지 않았다.
2008년에 폐장돼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옛 서울운동장). 사진 가운데 왼쪽이 야구장, 오른쪽이 축구장이었다. ⓒ서울시 사진기록화사업 2005 • http://data.si.re.kr/node/13466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골목길 축구
아이들의 연중무휴 놀이터, 골목길은 또 다른 축구장이었다. 골대는 큼지막한 돌멩이 두 개, 터치라인도 없고 골라인도 없고 오프사이드도 없이 벽을 이용한 벽치기가 허용되는 골목길 미니 축구는 날마다 계속됐고 해가 어둑어둑해질 때쯤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끝났다. 이기겠다는 경쟁심이 후끈 달아오른 나머지 축구공이 골목길을 벗어나 대로변까지 굴러가기 일쑤였고 간혹 도로를 달리던 차바퀴에 깔려 펑크가 나는 재수 없는 날도 있었다.
공놀이 도중 동네 어른들에게 혼나는 일도 많았다. 축구공이 연탄재를 강타할 때와 축구공이 골목길 담벼락을 넘어 가정집 유리창을 깰 때다. 골목길 구석에는 늘 제 몫을 다한 연탄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축구공과 연탄재가 언제라도 부딪힐 개연성이 정면충돌로 현실이 될 때 발생하는 푸석푸석한 먼지의 위력은 메가톤급이었다. 연탄재가 부서지면서 내뿜는 매캐한 잿빛 가루 먼지는 바람을 타고 사방팔방으로 인정사정없이 퍼져나가 시야를 흐리고 호흡을 방해했다. 이때 골목길을 지나가는 어른들은 조건반사적으로 고함을 치지만 아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던 공놀이에 계속 매달릴 뿐이었다.
축구공이 유리창을 파손하는 일이 터졌을 때는 사정이 복잡하다. 연탄재야 시간이 지나면 공중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춘다지만 깨진 유리창은 다시 살릴 수 없어 못 본채 넘어갈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담벼락 너머에서 쨍그랑,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은 일단 빛의 속도로 줄행랑을 쳤다. 이웃집 사정을 제집처럼 훤히 꿰고 있던 시절이라 공놀이 일당(一黨)은 이내 색출되고 마는데 해결 방식은 둘 중 하나다. 유리창을 깬 아이의 집에서 유리창 값을 물어내거나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꾸짖으면서 사과(謝過)로 마무리하는 경우다. 전자(前者)든 후자(後者)든 결론은 유리창 주인의 마음에 달린 것이 분명 하나 아무래도 이웃 간 정(情)이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분명하다.
국내 아마추어 축구 대회의 요람 역할을 했던 효창운동장. ⓒWaka77l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1970년대의 국내 축구 대회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때가 있었다. 맨땅 축구에 관한 이야기다. 맨땅 축구는 1970년대 국내 축구 대회에서 흔한 풍경이었다. 전국 규모의 메이저 축구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서울의 잔디 구장은 지금은 없어진 서울운동장과 효창운동장 두 곳뿐이었다. 서울운동장에서는 국가대표 A매치를 포함한 국가대표급 경기와 국제 경기가, 효창운동장에서는 국내 아마추어 경기가 펼쳐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짧은 기간에 많은 경기를 소화해야 하는 전국대회 예선은 효창운동장을 포함한 맨땅의 보조구장에서 동시에 치를 수밖에 없었다. 서울이 이럴진대 지방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구에도 공식 대회를 치를 수 있는 잔디 구장은 대구시민운동장(2020년부터 대구복합스포츠타운으로 명칭 변경)이 유일했다. 한국 스포츠의 산실(産室)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서울운동장(1945~1984)은 경성(京城) 운동장(1925~1945)으로 출발해 동대문운동장(1984~2008) 시절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풍고 박용주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맨땅 축구 경기를 처음 목격했다. 살던 집 근처의 대구고등학교 운동장에서였다. 학교 정문에 OOO쟁탈 경북 고교축구선수권대회 예선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내가 직관(直觀)한 경기는 대구에서 약 40km 떨어진 경북 변방의 현풍고와 상대 팀의 경기였다. 상대 팀 이름은 기억에 없고 현풍고만 떠오르는 이유는 이 해에 벌어진 제2회 문체부장관기(당시 문교부 장관기) 전국 고교축구대회에서 2위에 입상하는 파란을 일으킨 현풍고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73년, 눈앞에서 처음 본 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의 몸놀림은 엄청 빨랐고 공을 다루는 발재간이 신기하고 현란해 넋을 잃고 바라본 기억이 난다. 예상대로 현풍고가 일방적인 경기 끝에 승리했는데 이때 주전 공격수가 2년 후인 1975년 국가대표 미드필더로 발탁된 박용주(1955~)다. 박용주는 170cm에 불과한 단신(短身)이지만 발이 빠르고 돌파력과 개인기가 뛰어나 현풍고 시절 초고교급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단체 합숙 훈련과는 어울리지 않는 보헤미안 기질이 강해 국가대표팀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했다. 현풍고 축구부는 박용주가 졸업한 1974년 재정 문제로 해체됐다가 2009년 대구 FC U-18 팀으로 재창단됐다.
국가대표로 활동하던 1972년 당시의 이회택. 이듬해 이회택은 실업 축구팀 포항제철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포항제철 이회택
희한하게도 대구고에서 또 한 번의 맨땅 축구 경기를 구경할 기회가 생겼다. 현풍고 경기를 관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대 최고의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이회택(1946~)이 소속된 실업 축구팀 포항제철(현 프로축구 포항 스틸러스)이 대구고에서 연습경기를 치른다는 소식이 입소문을 타고 전해진 것이다. 당시 이회택은 ‘풍운아’라는 별칭답게 경기장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골잡이로 유명했다. 공짜로 이회택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또래의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이회택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탄성을 질렀고 슛이 골대를 빗나갈 때는 아쉬움의 한숨을 지었다. 아쉽게도 이날 이회택은 골을 넣지 못했고 후반전에 교체됐는데 피치(경기장)를 벗어나면서 축구화를 벗어 냅다 내동댕이치는 모습에 모두 다 깜짝 놀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던 차에 교체 신호가 떨어지자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우연하게도 맨땅 운동장에서 두 번이나 눈의 호사(豪奢)를 만끽한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1970년대 국가대표 축구팀의 훈련 모습. 맨 왼쪽은 김재한,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회택이다.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여든을 코앞에 둔 이회택은 현재 프로축구 K리그 2 김포 FC의 기술고문을 맡고 있다. 김포는 이회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도심지 재개발에 따라 외곽으로 이전한 여느 학교와 달리 대구고는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맨땅 축구는 빙판 위에서 달리기 레이스를 펼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언제라도 크게 다칠 수 있는 맨땅 축구가 50년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열렸고 대수롭지 않게 관전했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