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18. 1970년대 후반 청구고(靑丘高)의 퍼포먼스
축구 18. 1970년대 후반 청구고(靑丘高)의 퍼포먼스
#한일 고교 축구 교환경기의 추억
“… 축구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일본 시즈오카(靜岡)의 OOO 경기장입니다. 잠시 후 이곳에서는 한국 대표 대구 청구고와 일본 대표 □□□고 간의 한일 고교 축구 교환경기가 벌어지겠습니다. 오늘 경기 해설에는 △△△, 캐스터 ▷▷▷입니다.”
지지직거리며 들리는 시즈오카 현지발(發) 캐스터의 음성에는 긴장감과 비장감이 서렸다. 한일 간의 스포츠 대결에서는 으레 그러한 법,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라디오 전파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온 중계 캐스터의 오프닝 멘트는 빠른 속도로 줄달음쳤고 듣는 이의 숨은 덩달아 가빴다. 청각 효과만으로 현장감을 살려야 하는 라디오 중계는 TV 중계와는 다른 차원의 박진감이 넘친다. 경기가 시작되면 오직 음성만으로 현장 상황을 청취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라디오 중계는 캐스터의 역할이 막중하다.
라디오 중계의 관건은 캐스터의 음성에 실린 현장 상황이 청취자의 머릿속에서 시각적으로 변주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캐스터가 속사포처럼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가고, 눈앞에 보이는 장면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목소리에 탁본(拓本)을 뜨듯이 정교하게 묘사해야 하는 이유다. 달변(達辯)에다 축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더해 임기응변력까지 3박자를 다 갖춰야 하는 스포츠 캐스터들이 TV 중계보다 라디오 중계를 더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지금과 달리 1970년대의 스포츠 중계가 라디오로 편성되는 일은 일반적이었다. 국내 경기는 물론 해외에서 열리는 경기도 TV 대신 라디오를 통해 중계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예산과 장비, 인력 등 방송 환경이 선진화되기 전이라 축구뿐 아니라 고교 야구와 프로복싱 등 인기 스포츠를 라디오로 접할 일이 많았다. 특히 중계방송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해외 경기에서 라디오 중계가 흔했다. 글로벌 영상 미디어 시대인 요즘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1970년대에는 관행처럼 펼쳐졌다.
올드팬들에게 익숙한 라디오 중계는 의외로 매력적이다. 캐스터의 목소리를 한 번 놓치면 현장 분위기를 파악할 길이 없기에 청취자들의 방송 몰입도가 높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귀를 쫑긋 세우며 애간장을 태우게 하는 스릴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야구처럼 공수(攻守) 교대도 없고 농구처럼 작전 타임도 없고 복싱처럼 라운드 사이의 휴식 시간도 없이 주심의 휘슬 소리가 울리기 전에는 선수들의 플레이가 멈추지 않는 축구 경기야말로 라디오 중계의 백미(白眉)가 아닐까, 싶다.
대구 지역 방송에서 라디오로 위성 중계한 이날 경기에서 청구고는 한국 고교 최강답게 몇 수 가르치는 경기력을 여유롭게 펼치며 서너 골 차로 완승(完勝)한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스포츠를 좋아한 나는 집에서 라디오를 켜놓고 이날 경기 중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청취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격변기였던 1979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1979년은 황금세대 4인방을 앞세운 청구고가 고교 축구계를 평정한 해였다. 황금세대의 2년 후배들도 1981년 문교부 장관기 전국 고교 축구대회 결승에서 강릉농공고(현 강릉 중앙고)를 3-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청구고 16회 졸업 앨범>
#1979년, 고교 축구계를 평정한 청구고
1970년대 후반 국내 고교 축구계를 평정한 대구 청구고에 얽힌 이야기다.
시즈오카 한일 고교 축구 교환경기에 출전한 해에 청구고는 고교 축구계의 절대 강자로 우뚝 섰다. 1년에 한 번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힘든 판에 무려 다섯 번이나 정상 고지를 밟은 것이다. 최고 권위의 대통령금배를 포함해 문교부 장관기와 부산 청룡기, 일본에서 열린 국제 주니어 축구대회 등 5관왕의 위업을 달성해 청구고 축구부 역사에 정점을 찍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5관왕의 주역인 3학년 네 명이 훗날 모두 국가대표로 발탁됐다는 사실이다. 한 학교에서 성인 국가대표 한 명을 배출하기도 쉽지 않은 마당에 1961년생 동갑내기 동기(同期) 넷 전부 태극마크를 달았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바로 1980년대에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한국 축구의 위상을 빛낸 청구고 황금세대 4인방, 변병주-박경훈-백종철-백치수다. 국내 축구 역사상 동기 넷을 국가대표로 배출한 학교는 청구고가 유일할 것이다. 1979년의 청구고 전력은 가히 탈(脫) 고교급이었고 웬만한 대학팀과 붙어도 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청구고의 등장과 1차 전성기
사립 남고(男高)인 청구고 축구부는 1972년 11월 창단됐다. 모든 일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듯이, 청구고 축구부의 창단에도 한 해 전 교장으로 부임한 서경윤 교장의 남다른 축구 사랑이 기폭제가 됐다. 이사장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은 서경윤 교장의 의지는 1974년 첫 우승으로 빛을 보게 됐다. 창단 2년 만의 문교부 장관기 우승으로 고교 축구 무대의 신흥 강호로 눈도장을 찍은 청구고는 1975년 첫 번째 전성기를 맞는다. 대통령금배 전국 고교축구대회와 부산 청룡기 전국 고교축구대회에 이어 포항제철(현 포스코) 회장배 전국 우수 고교 초청대회까지 제패해 3관왕을 차지했다.
특히 TV로 중계된 제8회 대통령금배 전국 고교축구대회 결승에서 박종환 감독(1936~2023)이 이끌던 전남기계공고(현 광주공고)와 재경기 끝에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공동우승을 차지한 장면은 고교 축구의 손꼽히는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다. 청구고로서는 고교 축구의 명문으로 발돋움하는 계기였고, 전남기계공고의 박종환 감독으로서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축구계에 각인시키는 강력한 불씨로 작용했다. 1968년에 창설된 대통령금배에서 공동우승 기록은 1975년이 유일하다.
#청구고 전설의 비결
창단한 지 불과 7년 만에 고고 축구의 패권고(覇權高)로 군림한 청구고 돌풍의 한복판에는 황금세대 4인방을 조련한 명장(名將) 김두선(1937~2010) 감독이 버티고 있었다. 1960년대 국가대표 미드필더 출신인 김두선 감독이 짧은 기간 내에 지방의 신생팀 청구고를 축구 명문고로 육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창단 때부터 지켜온 자신만의 지도 철학에서 비롯됐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될성부른 재목(材木)을 발굴하는 안목과 선수 개개인의 장점을 극대화한 맞춤형 포지션 전략에다 팀워크를 우선시하는 원-팀 정신을 강조하는 전술 개발이야말로 청구고 축구부의 고속 성장을 견인한 디딤돌이었다. 김두선 감독의 눈에 들어온 대표적인 선수가 경기도 파주 교하중학교 3학년 때 스카우트돼 청구고와 같은 재단 산하의 청구중학교로 전학을 온 변병주다.
변병주가 청구중학교 유니폼을 입고 난 뒤 전설처럼 전해지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공식 대회 경기 중 부상으로 실려 나간 청구고 선수 대신 깜짝 기용된 변병주가 고등학교 선배들을 상대로 골을 넣는 믿기지 않는 활약을 펼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중학생이 고등학교 경기에 투입된 기이한 부정 출전 사실은 금방 들통나고 말았다는데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것과는 별개로 변병주의 출중한 기량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는 딴 세상 이야기인 학원 스포츠계의 부정 선수는 나이나 학력을 속인 상급 학교 선수가 하급 학교 경기에 출전하는 것을 일컫는 것일진대 변병주는 반대의 사례라 그 자체로 화제가 되고도 남을 일이다.
김두선 감독은 1962년 제4회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과 1964 AFC(아시아축구연맹, Asian Football Confederation) 아시안컵 한국 대표로 출전했었다.
#무승부로 끝난 김두선 감독과 박종환 감독의 지략 대결
개인적으로는 1979년의 5관왕보다 1975년의 대통령금배 우승이 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TV 중계로 그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기도 했고, 경기 내용이 워낙 드라마틱하게 전개됐기 때문이다. 지금도 주요 경기 장면을 기억하는데 명승부답게 명장면이 속출했다. 가령 코너킥으로 넘어온 공이 크로스바 한쪽 끝에 얹혀 반대쪽으로 데구루루 굴러가는 보기 드문 장면이 포착된다거나 골라인 근처 사각지대에서 슛한 볼이 골대 안쪽을 강타하고 튕겨 나오는 아찔한 모습이 연출된다거나 야신존으로 빨려 들어가는 골이나 다름없는 슛을 골키퍼가 막아내는 감각적인 슈퍼 세이브 등이 그러했다. 선이 굵으면서도 빠르고 영리한 플레이를 선호하는 김두선 청구고 감독과 지칠 줄 모르는 투지를 앞세워 많이 뛰는 조직력 축구를 구사하는 박종환 전남기계공고 감독의 지략(智略) 대결도 볼만했다.
결승전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승부차기로 우승을 가리는 요즘과 달리 그때는 재경기를 치른 뒤에도 무승부면 공동우승으로 처리했다. 하늘이 점지한 천운(天運)이 따라야 하는 승부차기로 희비가 엇갈리는 것보다는 재경기 후 공동우승이 차라리 합리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1981년 문교부 장관기 전국 고교 축구대회 3연패를 달성한 직후 촬영한 단체 기념사진. <사진=청구고 16회 졸업 앨범>
#청구고의 독특한 빌드업 방식
1979년, 황금세대 4인방이 이끈 청구고의 빌드업 방식은 명료했고, 그 효과와 위력은 강력했다. 이를테면 오른쪽 풀백이면서 윙백을 겸한 박경훈이 당시에는 생소한 오버래핑으로 빠르게 치고 올라간 뒤 동일 라인의 윙 포워드 변병주에게 패스해 공격의 물길을 확장하는 식이었는데 청구고의 18번 레퍼토리라 상대도 그 루트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청구고의 빌드업 경로를 상대가 알면서도 정작 그들이 꺼내 들 대책은 신통치 않았다. 일단 상대 수비가 저지하기에는 박경훈의 발이 워낙 빨랐고 공간 흐름을 읽는 축구 지능마저 남달라 적진 깊숙이 침투해 있는 변병주 앞에 패스가 연결될 확률이 아주 높았기 때문이었다.
변병주는 더 빨랐다. 박경훈은 11초대에, 변병주는 11초에 100m를 주파했다. 둘의 스피드는 상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변병주의 별칭이 총알이었겠는가. 박경훈~변병주로 이어지는 빌드업 루트는 청구고가 즐겨 사용한 득점 방정식이었다. 변병주가 직접 골을 넣거나 또 다른 두 공격수, 백종철과 백치수의 가세로 상대 골문은 쉽게 열리곤 했다.
오버래핑을 통한 기습적인 공격 가담이 전매특허인 박경훈은 골도 곧잘 터뜨렸다. 상대 공격수의 돌파 시도를 선제적으로 봉쇄하는 빠른 발과 두뇌 플레이가 탑재된 수비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훗날 박경훈이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정신으로 축구 선수로서는 드물게 박사학위까지 취득할 수 있었던 것도 수읽기에 능한 그의 영리한 플레이 방식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상대 팀의 경계 대상 1호인 변병주의 문전 돌파가 여의찮더라도 백종철과 백치수라는 또 다른 걸출한 해결사들이 버틴 청구고의 공격력은 가히 족탈불급(足脫不及)의 수준이었다. 1970년대 후반 고교 축구계에서 오버래핑 빌드업과 속전속결의 스피드 축구를 선보인 청구고의 독특한 전술은 탈고교급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청구고를 기억하는 올드팬들이 많은 이유일 것이다. 황금세대 4인방 모두 모교(母校)인 청구고 감독을 역임한 것도 이례적이다. 1979년 고교 축구계를 빛낸 청구고 황금세대 4인방의 재현(再現)은 아마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