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포츠지와의 인연
1. 스포츠지와의 인연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74년, 처음으로 돈을 주고 신문을 샀다. 집 근처 도로변 잡화용품점 신문 코너에서 집어 든 것은 1969년에 창간한 국내 유일의 스포츠신문이었다. 지금의 일간스포츠다. 그해 여름에 열릴 서독 월드컵(FIFA 월드컵 1974) 특집 기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개최국 서독의 주장이자 공격형 스위퍼의 대명사 프란츠 베켄바워(1945~2024), 폭격기란 별명답게 세계 축구사의 스트라이커 계보에 굵직한 족적(足跡)을 남긴 게르트 뮐러(1945~2021), 토털 풋볼의 지휘자로 현대 축구 전술사에 한 획을 그은 네덜란드의 요한 크라위프(1947~2016)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에 대한 심층 기사는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축구와 야구, 복싱 등 스포츠라면 두루 좋아하는 내가 스포츠지와 맺은 첫 인연이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의 스포츠 인프라는 보잘것없었다. 해외 스포츠 스타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할 여력이 없었고, 프로복싱을 제외하고는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 메달을 목표로 하는 아마추어 일변도라 스포츠의 산업화는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미국 4대 프로스포츠와 유럽 프로축구 경기는 딴 나라 얘기고 축구와 야구 대표팀의 수준도 탈아시아를 노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종합지 체육면이래야 국내 스포츠 기사 일색이고 그나마 지면의 크기가 턱없이 작아 심층 보도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채널 선택권이 3개뿐인 흑백 TV라고 사정이 다를 리 없었다.
위안이라면 이역만리(異域萬里) 낯선 땅에서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전이 벌어지는 날, 전 국민이 위성 중계 TV 화면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한국 선수의 승리를 두 손 모아 기원하는 것이었다. 해외에서 펼쳐지는 국가대표 축구 대표팀의 경기도 초미(焦眉)의 관심사였다. 태국 방콕 국립경기장에서 킹스컵 국제축구대회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메르데카 스타디움에서 메르데카컵 국제축구대회가 열리는 날에는 모두가 위성 중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캐스터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일희일비(一喜一悲)했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을 뚫고 들려오는 캐스터의 오프닝 멘트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태국의 수도 방콕, 방콕 국립경기장입니다. 잠시 후 이곳에서는 한국과 개최국 태국 간의 킹스컵 국제축구대회 개막전이 열리겠습니다.”
1970년대 킹스컵과 메르데카컵은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박스컵(Park’s Cup)과 함께 아시아 3대 국제축구대회로 인기가 많았다. 어린이 팬들을 사로잡은 프로레슬링의 인기도 대단했지만 사전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엔터테인먼트 성격의 고난도 행위예술이라 순수 스포츠와는 차원이 다른 영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뿐인 스포츠지의 존재는 12살 어린이에게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1981년 9월 우리나라가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고 1982년과 1983년,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프로씨름이 잇따라 출범하면서 국내 스포츠계의 지형에도 일대 변화가 찾아왔다. 야구와 축구, 씨름, 복싱 등 4대 프로스포츠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가 높아지고 팬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언론의 보도 행태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문들이 앞다퉈 프로스포츠를 다뤘고 방송사들은 연일 생중계로 시청자들을 불러 모았다. 프로스포츠의 열기는 곧 스포츠지의 창간 수요로 이어져 1985년 6월 마침내 국내 두 번째 스포츠지가 탄생했다. 한글 가로쓰기 컬러 지면을 기치로 내건 스포츠서울의 등장이다.
1987년 11월 18일 2년 3개월 간의 군 복무를 마쳤다. 이미 대학을 졸업한 나는 곧장 취업 전선에 뛰어들 채비를 갖춰야 했다. 진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흠모한 스포츠의 매력에 푹 빠져 일찌감치 스포츠지 기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린 눈에 비친 스포츠의 현장에는 감동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는 언제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운 경기 막판, 극적으로 역전하거나 승리의 축가를 부르며 기쁨에 들뜬 종료 직전, 기습에 의한 통한의 동점 골을 내주며 땅을 치는 일은 각본 없는 드라마 그 자체였다.
당시 언론사 입사 경쟁률은 치열했다. 세간에서는 언론고시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다. 시험 준비 기간을 1년으로 잡았다. 채용 방법은 1차 영어와 일반상식 사지선다 객관식 시험, 2차 논술형 작문 시험, 3차 면접이었다. 영어는 토플 유형이고 일반상식은 시사, 한문, 속담, 국어 등을 망라해 범위가 방대했다. 논술 시험의 당락은 논리적 사고와 배경지식, 문장력 등에 달려 있었다.
그해 12월부터 고향인 대구의 경북대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경북대 법대에 재학 중인 고등학교 친구의 도움으로 도서관 출입증을 발급받았다. 카이스트 박사 과정에 다니던 또 다른 고교 친구와 함께 매일 도서관에 나갔다. 문제가 생겼다. 12월 중순 어느 날 오후에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의자에 걸쳐놓은 두툼한 오리털 파카가 없어졌다. 황당했다. 큰형이 선물한 근사한 노란색 파카는 나하고 인연이 없는 모양이었다. 벌벌 떨면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도서관에서 파카를 잃어버렸다는 내 말을 믿지 않으려 하는 어머니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경북대 도서관에는 더 이상 나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본가(本家) 작은방 아랫목에 큰 상을 펴고 공부에 집중했다. 오래된 기와집이라 천장 위에서 수시로 쥐들이 찍찍거리며 난리를 쳤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내 할 일만 했다.
이듬해 3월 초 SS라는 약칭으로 불리던 스포츠신문에 공채 선발시험 공고가 났다. 창간 3년 만에 첫 공채 기자를 뽑는 전형이었다. 그러잖아도 이전부터 입사를 희망한 회사라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군대 시절 서울로 외출을 나가거나 외박 때마다 아침저녁으로 즐겨본 신문이었다. 작문에는 자신 있었던 터라 1차 통과가 관건이라 생각했다. 빡빡한 일정 탓에 학습량이 충분치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일반상식에서 기대 이상의 고득점을 올려 걱정을 덜었다.
4월 중순 무렵,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2차 시험장인 동대문 한양공고로 향했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버스가 그날따라 늦게 도착했다. 일요일인데도 전철 안이 복잡하고 환승 통로도 북적거려 시간이 자꾸 지체됐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시험장에 도착하니 아뿔싸, 5분 지각이다. 규정대로라면 입실이 불가한 상황. 난감했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묘수를 꺼내 들었다. 감독관에게 제일 먼저 퇴실할 테니 입실을 허용해 달라고 사정했다. ‘별 희한한 놈 다 봤다’라는 표정으로 감독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시생들이 8절지 형태의 답안지 뒷면을 넘겨 계속 써내려 가거나 말거나 핵심을 정리해 앞면만 빼곡히 메웠다. 시계를 보니 시험 종료 10분 전.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유유히 고사장을 빠져나왔다. 논술 문제 제목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민주사회에서의 대중 스타의 역할에 관하여 논하시오.’ 팝스타 마이클 잭슨과 전 프로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의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한 기억이 난다. 열렬한 프로복싱 팬인 경험이 도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