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지각
35. 지각
약속은 신뢰의 기준이자 신용 자산
누군가를 기다려봤는가.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약속을 정한다. 몇 월 며칠 몇 시 어디서.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상대가 오지 않으면 자꾸만 시계를 쳐다본다. 언제 올지 몰라 초조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행위에는 인내와 고통이 따른다. 마땅하지 않은 상대의 처신을 억지로 참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괜한 힘을 써야 한다. 지각을 하면 안 되는 이유다.
모든 약속은 미래에 벌어질 일을 어기지 않기로 서로 다짐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약속의 끝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만남이 전제된 약속에는 날짜와 시간, 장소가 특정된다. 특정되는 세 요소 중 지각은 시간을 지키지 않을 때 발생한다. 약속은 타인과의 신뢰의 기준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용 자산을 축적하는 마음가짐이다.
약속 장소에서 약속 시간을 넘겨 기다리는 시간은 막막하다. 막막함은 오기로 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날 때까지 계속된다. 살면서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려본 경험이 여러 번 있다. 겪어본 사람은 다 안다. 약속 시간이 지나 기다릴 때의 그 답답한 불안감이란 것을. 지각도 늘 하는 사람이 한다. 지각이 버릇인 까닭이다. 약속 시간에 늦는 일이 몸에 밴 사람에게 지각은 무감각하다. 지각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지각의 중독성이다.
일상적으로 지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게으르거나 오만하거나. 게으른 사람은 시간에 끌려다니고, 오만한 사람은 자의식에 끌려다닌다. 전자는 삶의 태만이고, 후자는 삐뚤어진 자존감이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어느 쪽이나 상대를 기만하고 피해를 안기는 행위다. 누구나 지각을 할 수는 있다.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을 때다. 그렇지 않다면 예의에 어긋나는 짓임을 자각하고 일회성 일탈로 그쳐야 한다.
친구한테 바람맞은 기억
학창 시절, 대낮에 길거리에서 바람맞은 적이 있다. 대학교 4학년 때다. 대구 동성로 한복판에서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방학 때는 물론 학기 중에도 고향에 내려가면 꼭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던 단짝 친구였다. 약속 장소는 지금은 폐점된 대구백화점 본점 앞. 1980년대 초반 대구백화점 앞 대로변은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백화점 주변에는 늘 대학생들과 20대 직장인들로 붐볐다. 서울의 종로서적 앞이 그랬듯이.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친구는 오지 않았다. 핸드폰이 없던 때라 거리 곳곳에 공중전화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친구의 집으로 대여섯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45분간 하염없이 기다리는 동안 낭패감이 들었다. 난생처음 친구한테 바람맞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친구는 그날, 혼자 배낭을 메고 대구 근교의 산에 올랐다.
지각의 중독성
지각이 습관성이라는 것은 요즘에도 실감한다. 만난 지 40년을 훌쩍 넘긴 오래된 친구라면 웬만큼의 허물쯤이야 못 본채 넘어갈 만하다. 늦어도 한 달 주기로 얼굴을 보는 나로서나 그로서나 막역한 사이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 친구에게서 매번 느끼는 한 가지 아쉬움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일상적 지각이다. 일부러 그럴 리야 있겠냐만 친구는 거의 매번 나의 인내심을 저울질하려는지 느지막이 자리에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친구도 사정이 있겠거니 이해하고 넘어가다가도 지속적인 습관성 지각 앞에서는 결국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다. 안 되겠다, 싶어 한 번은 작정하고 에둘러 불편한 속뜻을 내비쳤다.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공연히 그러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상으로 굳어진 습관이 참 무섭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누군가를 속절없이 기다리는 것처럼 처량한 일도 없다.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지, 기다려보면 안다.
국회의원 출신 한 전직 대통령은 의원 시절, 약속 시간보다 15분 빨리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시간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서는 정치적 신의를 기대할 수 없다는 생활 철학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도 약속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것이 몸에 밴 인물이 있다. 그는 항상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근처를 한 바퀴 휘리릭 둘러본 뒤 정시(定時)에 맞춰 자리에 앉는 규칙주의자다. 본보기가 될 만한 좋은 습성이다.
습관의 속성
지각을 방지하는 최선책은 시간적 여유를 두고 나서는 것이다. 가령 약속 시간보다 20~30분 일찍 출발하면 늦을 일이 없고 심리적으로도 든든하다. 시간 싸움에서 주도권을 쥐면 없던 행운도 생길 수 있다.
습관의 속성은 끈질김이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도 어렵고,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도 어렵다. 습관은 마음먹기에 따라 약(藥)이 되기도 하고 독(毒)이 되기도 한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나쁜 버릇을 멀리하고 좋은 버릇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다. 직장 초년병 시절, 지각을 엄하게 다스린 상사도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옳지 않은 습관의 늪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합리화의 유혹에 갇히게 된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젊은 시절 전날의 과음 때문에 약속을 어긴 적이 몇 번 있다. 두고두고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