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둔 이야기

4. 도제식 일대일 훈련

by 박인권

4. 도제식 일대일 훈련


철제 캐비닛

캐비닛 문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해 손잡이가 반들반들했다. 대형 철제 캐비닛을 열었다. 마감용 원고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수습 기간이 시작되면서 신문사에서 사용하는 원고지를 처음 보았다. 200자 원고지와는 칸수도 다르고 줄의 수도 달라 생소했다. 캐비닛 안에는 원고지 묶음 외에도 각종 필기도구와 복사 용지 등 사무용품들이 그득 들어있었다. 캐비닛 옆에 똑같은 모양의 철제 캐비닛이 있었고 그보다 키가 낮은 캐비닛도 보였다. 최근 발행한 한 달 치 자사 및 타사 신문 뭉치와 데스크의 교열을 거친 기사 원본,

교열부 기자들의 손때가 묻은 워드 프로세싱 원고, 일상적인 비품(備品)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웠다.


그중 특이한 것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체육부 야구팀 기자들의 업무용 내부 자료인 투수일지다. 투수 일지는 프로야구 담당 기자들이 각 구단의 투수들이 등판한 날과 투구 내용, 경기 결과, 특기사항 등을 경기 후 정리해 참고 자료로 사용할 목적으로 야구팀에서 자체 개발해 주문 제작한 두툼한 노트다. 투수일지에는 투수들의 등판 날짜와 등판 상황, 상대 팀, 경기 장소, 투구 이닝, 투구 수, 피안타, 피홈런, 삼진, 사사구, 실점, 자책점, 방어율, 승, 패, 세이브 등 투구 내용 일체를 알 수 있는 기록들이 담겨 있다. 스포츠서울 야구팀에서는 창간 때부터 자체 개발한 투수일지를 사용해 왔다. 투수일지는 경기장에 나가는 기자들이 꼭 챙겨야 할 필수 아이템이자 기사를 작성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였다.


복잡한 야구 통계의 세분화와 광역 인터넷망이 보급되기 전인 1980년대~90년대 초, 각 사의 프로야구 기자들은 수작업으로 경기 기록을 자료화했다. 물론 이때도 팀 기록과 투타 기록 등 기본적인 정보는 KBO(한국야구위원회)에서 제공했다. 그러나 전산 시스템의 인터넷화가 이뤄지기 전이라 실시간 정보 제공에 한계가 있었고, 야구 통계의 진화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스포츠지 야구 기자들은 각사별로 별도의 지침에 따라 기록을 관리했다. 당시 경기자료 정리는 야구 기자들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그것을 토대로 경기 이면에 감춰진 투수의 활약상을 발굴해 화제성 기사로 보도하곤 했다.


가령 A 구단의 B 투수는 피안타율에 비해 실점이 적어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나고 투구의 효용성이 높다든지, C 구단의 D 투수는 투아웃 또는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실점률이 높아 볼 배합과 집중력에 문제가 있다든지, E 구단의 F 투수는 실점 대비 자책점 비율이 낮아 팀의 수비력에 문제가 있다든지 하는 식이다. 또 G 구단의 H 선발투수는 초반 3이닝까지는 호투하다가 4, 5회 들어 컨디션 난조에 빠지는 사례가 많아 선발보다는 중간 계투가 적합하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천태만상인 육필(肉筆) 원고

우연히 마감 중이던 선배 기자의 원고를 보게 됐다. 화장실을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힐끔 본 원고는 난수표나 다름없었다. 원고지에 휘갈겨 쓴 글자는 분명 한글인데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필체가 시원찮은 나로서도 민망할 정도로 악필(惡筆)이었다. 놀라운 점은 암호를 해독하듯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들여다봐야 겨우 알아볼까 말까 한 선배 기자의 원고를 검은 사인펜으로 수정하는 작업을 척척 해내는 데스크의 태연한 모습이었다. 편집부로 넘어간 원고에는 교정부호와 함께 바꾸고 빼고 고치고 띄어 쓴 흔적이 난무했다. 이 원고를 토대로 워드 프로세서 작업을 번개처럼 해내는 전산부 여직원들의 눈매는 더욱 놀라웠다. 입사 초년병 수습기자의 눈에 비친 그들 모두 경외의 대상이었다.

신기해하는 나에게 데스크는 이런 말을 했다.

“이놈아, 문제는 필체(筆體)가 아니라 필력(筆力)이란 말이다!”


원고지에 기사를 작성하던 시절, 편집국에는 악필들이 많았다. 필체는 성격을 닮는다지만 지내놓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필체나 필력이나 타고난 재능이라는 점일 것이다. 마감에 쫓기는 선배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원고를 쓰는 그들의 손놀림은 분주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책상 위에 쌓인 파지(破紙)도 늘어만 갔다. 탈고하는 내내 그들은 습관처럼 몸에 밴 흥미로운 몸짓을 드러냈다. 머리를 쥐어뜯고 손톱을 깨물고 줄담배를 피우고 다리를 떨고 혼자만의 소리를 중얼거리는 식이었다.


고마운 멘토

수습기자의 훈련은 철저한 도제식(徒弟式)으로 이뤄졌다. 멘토는 같은 부서 내 바로 위 기수 선배. 그 시절에는 사수(射手)라 불렀다. 멘토는 회사 생활 전반에 관한 조언자로 새내기 기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떤 멘토를 만나느냐는 순전히 운(運)에 달려 있다. 기자 정신이 투철하고 글도 잘 쓰고 됨됨이도 올곧은 멘토를 만난다면 그보다 좋은 운이 없을 것이다. 다행히 나보다 두 살 위의 멘토는 그런 유형에 가까웠다. 그는 필력도 뛰어났고 인격적으로도 본받을 만했다. 내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길잡이를 자처했고 스스럼없이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나 실무적으로 의지하며 수습기자 생활을 큰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던 데에는 멘토의 역할이 컸다. 고마운 선배다.


정 깊은 데스크

데스크의 운도 따랐다. 충청도 출신인 데스크는 말은 느릿느릿했지만, 판단은 빠르고 정확했다. 애주가(愛酒家)인 데스크는 술자리를 자주 만들었고 그럴 때마다 부서 막내인 나에게 주도(酒道)를 가르쳤다. 데스크의 음주(飮酒) 스타일은 정갈했다. 소주 한 모금에 안주 한 젓가락, 술 마시는 사이사이 물을 자주 마셨다. 주종(酒鍾)을 가리지 않는 대신 소식(小食)이 몸에 밴 탓인지 최소한의 안주만 집어 먹었다. 40대 후반인데도 옷매무새가 반듯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술자리가 길어지고 밤이 깊어지면 데스크와 나, 둘만 남았다. 조금씩, 오래도록 술을 마시는 마라톤 스타일인 데스크는 마지막 코스로 당신의 동네 단골 주점으로 나를 끌고 갔다. 술 마신 다음 날, 데스크는 어김없이 부서원 중 가장 먼저 출근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술판을 벌이는 데스크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주량(酒量)도 세지만 자기관리가 철저했다.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직진 스타일인 나를 데스크는 분에 넘치도록 챙겼다.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꼭 나를 데리고 갔다. 정이 많은 분이었다.


업무적으로는 얼음장처럼 차가워 전혀 딴판이었다. 빈틈이 없고 지적 사항이 발견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부서 내 후배 모두에게 냉정하고 엄격했다. 후배들을 질책할 때는 이름 대신 귀하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특히 단신 기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육하원칙에 입각한 스트레이트성 신문 기사의 기본이자 출발점이 다름 아닌 단신이라는 것이다. 맨 처음 훈련용 원고를 끙끙거리며 겨우 작성해 데스크 책상 위에 제출했을 때가 생각난다. 되돌아온 원고는 데스크가 교정을 본 검은 사인펜 글씨로 뒤덮여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은 사인펜 글씨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한 달이 지날 무렵, 내가 쓴 1단짜리 단신 기사가 처음으로 신문에 실렸다.


전쟁터 같은 신문사 환경에 연착륙하기까지에는 데스크의 세심한 배려와 도움이 컸다. 내가 체육부로 발령이 나고 얼마 뒤 데스크는 타 신문사로 이직했다. 옮긴 회사의 사회부장이던 그는 나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송구스럽게도 스포츠 기자의 꿈을 버릴 수 없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데스크는 정부 산하 단체의 임원으로 근무하던 2000년대 초, 예순을 갓 넘긴 이른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 놓인 영정(影幀) 사진이 뿌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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