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낯선 풍경
37. 낯선 풍경
며칠 전, 오후 늦게 지하철을 탔다. 한가한 시간대라 여기저기에 빈자리가 보였다. 내가 앉은자리 맞은편으로 자연스럽게 눈이 갔는데 뜻밖의 광경에 시선이 멈췄다. 20대 중후반쯤일 여성 승객이 두 손을 받침대 삼아 책을 읽고 있었다. 순간, 익숙한 객실 풍경 공식에 균열이 일어났다.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을 목격해서다. 지하철을 탄 승객 틈에서 책 읽는 모습이라니. 열의 아홉은 스마트폰 삼매경, 이것이 요즘의 세태 아니던가.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년마다 실시하는 국민 독서 실태조사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19세 이상 성인이 1년에 1권 이상 종이책을 읽은 종이책 독서율은 32.3%에 지나지 않았다. 종이책의 독서량 실태는 더욱 빈약하다. 성인이 1년 동안 읽은 종이책은 평균 1.7권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 열 명 중 7명은 1년에 종이책을 한 권도 읽지 않고, 국민 한 명이 읽는 연간 독서량은 2권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하철과 버스, 공원 등 공공장소에서 종이책을 읽는 풍경이 낯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 책을 읽지 않는 독서 장애 요인으로는 책 이외의 매체를 이용하거나(19.3%) 시간이 없고(17.8%) 책 읽는 습관이 들지 않아서(12.1%)라고 밝혀졌다. 책을 읽거나 종이신문을 정독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일상이 흔들린 데에는 책 이외의 매체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10년에 출시된 스마트폰의 등장은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삶의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스마트폰의 기능은 위력적인 디지털 파생상품을 낳았다. 페이스북, 트위터(현재의 X), 인스타그램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와 온라인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 인터넷으로 영화, 드라마, 방송 등의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OTT 서비스의 세계화 시대가 열리면서 아날로그 문화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세계인과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지구촌 디지털 블록이 형성되자 종이책과 종이신문의 위상은 예전보다 쪼그라들었고 그 여파는 가뜩이나 장기 불황에 빠진 국내 출판 산업에 직격탄을 날렸다.
손 안의 컴퓨터, 스마트폰의 효용성과 첨단 기술이 탑재된 디지털 콘텐츠는 위력적이다. 손가락 터치와 손놀림만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바다 건너 익명의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고 보고 싶은 드라마와 영화, 흥미진진한 게임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다. 디지털 콘텐츠의 득세는 아날로그 문화의 서식지를 야금야금 밀어내기 시작했다. 편리하고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콘텐츠의 위력에 밀려 텍스트의 물성(物性)에 기반한 아날로그 문화의 가치는 점점 옅어져 가고 있다.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영상과 사진, 짧은 글 위주의 소비 행태에 익숙해진 사이, 호흡이 느린 긴 글을 또박또박 읽으면서 터득할 수 있는 문해력에 비상이 걸렸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갈수록 학생들의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교육계의 진단과 문해력 강의를 신청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이 이를 말해준다. 문해력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문해력 학원도 있다고 한다. 스마트폰 숏폼(짧게 편집해 올린 동영상)과 생성형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도는 뇌 기능을 둔화시키고 인지능력을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공지능(AI)에 기대는 생활이 일상화되면서 정보의 옥석(玉石)을 가려내는 판별력과 사유의 힘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비판적 사고력과 집중력,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원동력(原動力)은 결국 문해력이다. 문해력은 곧 사유의 근육이고 그것은 깊이 있는 독서와 회의적 사고를 통해 길러진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간서치(看書痴)라 불렸다.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이다. 얼마나 책을 좋아했으면 한서(漢書)를 이불처럼 덮고 논어(論語)를 병풍처럼 둘러쳐 매서운 추위를 이겨냈다고 한다. 술 한 잔 안 마시면 근사한 책 2~3권은 살 수 있다.
인공지능의 도래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면 그에 종속되기보다 지적 능력을 성장시키는 보조 수단으로 삼는 선택적이고 신중한 자세가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시대, 읽지 않는 시대라 문해력의 사수(死守)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