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둔 이야기

8. 잠실 야구장

by 박인권

8. 잠실 야구장


1988년 6월 5일 잠실 야구장에서 벌어진 롯데-MBC 청룡 경기는 관중이 아닌 관찰자로 프로야구를 마주한 첫 경험이었다. 설렘보다는 긴장감이 앞섰고, 관중석에서 느긋하게 즐기던 경기 장면이 일터의 현장으로 변주되면서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관람자의 시선이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뀌는 순간, 경기장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들은 호기심과 흥미가 아닌 예의 주시의 대상이었다. 잠실 야구장 기자실은 홈플레이트에서 1루 쪽 백네트 뒤 1층에 있었다. 기자실에서 처음 내다본 경기장 안은 어색했다. 바로 앞을 가로막은 백네트가 시선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플레이가 촘촘하게 얽혀있는 그물망과 겹쳐 보여 경기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고, 시야의 방해하는 걸림돌이던 그물망 사이를 뚫고 경기장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새삼 망막의 적응력이 고마웠다.


신문기자실 바로 옆에 방송 기자실, 또 다른 곳에 사진 기자실이 보였다. 기록실은 신문기자실에서 좀 떨어진 홈플레이트 뒤편이라 투수의 투구 행위와 선수들의 플레이 전체를 한눈에 바라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기록실에는 KBO(한국야구위원회) 소속 경기 기록원 2명(어떨 때는 한 명)과 장내 아나운서 한 명이 근무했다. 심판실은 홈플레이트에서 3루 방향 초입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기에 출전하는 심판들과 대기 심판, 경기 감독관이 드나들었다.

기자실에는 경기장 창가 쪽으로 바싹 붙은 기다란 일자 테이블이 횡으로 설치돼 있었고 그 뒤로 횡 테이블이 하나 더, 그 뒤로 또 다른 횡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창가 쪽 횡 테이블 앞에는 각 사의 이름이 적힌 명패와 전용 내선 전화가 부착돼 있었다. 각 사의 야구 담당 1진 기자들이 앉는 자리다. 종합지와 달리 스포츠지는 구단별 담당 기자가 따로 있어 잠실 야구장을 공동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MBC 청룡(1990년부터 LG 트윈스)이나 OB 베어스(1999년부터 두산 베어스) 또는 원정팀 담당 기자가 그 자리에 앉았다.


기자실에는 기자들 외에 KBO에서 고용한 기자실 총무와 홈팀의 홍보 담당자가 수시로 들락거렸다. 기자실 총무는 경기가 있는 날, 기자실로 출근해 취재 편의와 관련된 잡무(雜務)를 보는 일종의 촉탁 사원이다. 1990년대 들어 기자실 총무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경기 시간이 임박해 도착한 기자들이 기자실로 배달 음식을 주문해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는 모습도 흔한 풍경이었다. 연거푸 두 경기가 펼쳐지는 연속경기 날에는 특히 더 그랬다. 행여 경기 흐름을 놓칠세라 조바심을 내느라 겨우 허기를 면하고자 먹는 시늉만 할 뿐이지만.


혼돈의 마감 상황

나를 데리고 잠실 야구장에 간 롯데 담당 선배 기자는 야구를 좋아했고 야구에 대해 많이 알았다. 원고지에 경기 상보(詳報)를 적어 전화로 불러주면 내근자가 받아 적던 시절이라 선배 기자는 8회 말 MBC 청룡의 공격이 시작될 무렵 사실상 원고 작성을 마무리한 상태였다. 8회 초까지 MBC 청룡에 1점 차(4-3)로 앞서간 롯데 자이언츠가 그대로 승리를 굳혀 주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앞서서였을 것이다. 마감 시간이 빠듯한 차에 롯데 담당 기자로서 가질 법한 인지상정이라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야구 격언은 비정하게도 8회 말 여지없이 본때를 드러냈다. 5회부터 7회까지 0의 행렬로 잠잠하던 MBC 청룡 타선이 거짓말처럼 대폭발해 단숨에 6점 차로 경기를 뒤집어버린 것이다.


경기 시간이 속절없이 길어지는 바람에 마감 시간은 이미 문턱을 넘어섰고 승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각 사의 전화통에 불이 났다. 원고를 새로 쓸 여유가 없는 다급한 상황에서 선배 기자의 노련미가 힘을 발휘했다. 그는 원고 없이 승부의 분수령이 된 8회 말 장면을 중심으로 MBC 청룡의 대역전 드라마를 즉석에서 전화로 구술(口述) 중계했다. 선배 기자는 이런 경험에 익숙한 듯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돌발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 장면을 구술로 기사화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경험과 노력으로 단련된 10년 차 기자의 면모가 느껴졌다.


경기 후 선배 기자와 함께 KBO 건물 지하 호프집으로 갔다. KBO 운영부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업무상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할 일이 많은 그는 선배 기자와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야구 담당 기자와 KBO 직원과의 만남. 술자리의 화제는 오늘 경기의 복기로 시작해 야구계 전반으로 흘러갔다. 둘 다 프로야구에 대한 열정이 넘쳐 경기장 안팎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1983년에 KBO에 입사한 그가 잘 알려지지 않은 프로야구 초창기 비화(祕話) 보따리를 하나둘씩 풀어놓을 때면 귀가 솔깃했다.


초유(初有)의 대형 트레이드

사전에 약속이 된 듯, 중년의 신사가 불쑥 합류했다. 롯데 구단의 전무였다. 큰 키는 아니지만 다부진 체격에 호남형으로 중저음의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KBO 직원이 자리를 뜨자 선배 기자는 당대 최고의 투수 최동원의 연봉 협상 진행 과정에 대해 캐물었다. 최동원은 시즌이 개막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연봉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구단과의 감정 대립이 원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6월 29일 최동원의 연봉 협상은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해 9월 최동원이 타의에 의해 강제로 롯데를 떠나는 빌미가 된 대형 사건이 터진다. 이른바 선수협의회 파동. 최동원은 9월 13일 창립총회를 여는 등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7개 구단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가뜩이나 감정이 좋지 않던 롯데 구단은 1988년 11월 24일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했다. 롯데 최동원이 삼성으로, 삼성 김시진이 롯데로 트레이드된 것이다. 한 달 뒤 삼성의 안타제조기 장효조와 롯데 김용철도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두 차례에 걸친 초대형 트레이드에 프로야구판이 술렁였다. 야구팬들은 구단이 슈퍼 갑인 시대상이 빚은 보복성 트레이드에 최동원과 장효조가 희생양이 됐다고 수군거렸다. 롯데 구단 전무도 1989년 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선수협회는 12년이 지난 2000년 1월에야 정식 출범했다.


야구 팀장의 알쏭달쏭한 말

KBO 지하 호프집의 술자리는 롯데 구단 전무의 인근 자택으로 옮겨 계속됐다. 전무에게는 아버지를 닮아 용모가 단정한 딸이 있었다. 서울 소재 모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날의 일을 기억 속에서 길어 올리게 한 일화가 있다. 프로야구 담당 기자로 활동하던 1991년 어느 날, 야구 팀장이 알쏭달쏭한 말을 건넸다.

“너, 하마터면 P 전무와 인연이 될 뻔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P 전무는 KBO 지하 호프집에서 만난 롯데 구단 전무를 말한다. 사연은 이렇다.


묻어둔 이야기 8-2. 미국의 저명한 스포츠 칼럼니스트 레너드 코페트가 저술한  20260322_203835.jpg

미국의 저명한 스포츠 칼럼니스트 레너드 코페트(1923~2003)가 저술한 ‘The New Thinking Fan’s Guide To Baseball’은 야구 서적의 고전으로 꼽히는 명저다. 야구의 본질을 심리적, 철학적으로 접근해 화제가 된 책이다. 코페트는 미국 스포츠계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야구란 무엇인가’라는 한국어판으로도 출간돼 국내에 알려졌다.


1990년 프로야구 시즌이 끝나고 야구팀 기자 전원이 잠실의 팀장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초대 손님으로 국가대표 감독과 롯데 감독을 지낸 원로 야구인이 와 있었다. 팀장과 각별한 사이였다. 내가 모르는 사이 그가 팀장에게 미혼인 나의 중매인(仲媒人)을 자처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상대는 P 전무의 딸.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나에게 팀장은 이제야 하는 말이라며 원로 야구인의 제안은 자신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았다고만 할 뿐, 왜 그랬는지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싶었다. 팀장은 20년 전 53세의 이른 나이로 고인(故人)이 됐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야구 전문기자다. 야구 서적의 고전(古典)으로 꼽히는 ‘The New Thinking Fan’s Guide To Baseball’(야구란 무엇인가, 레너드 코페트 지음, 민음인, 1999, 2009, 2022)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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