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에두아르 마네, 피리 부는 소년
에두아르 마네(1832~1883)
예술가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변화와 개혁의 실험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왜일까? 창작을 업(業)으로 삼는 예술가들에게 창의성과 도전정신, 남과 다르게 생각하기는 숙명적이자 필수 불가결한 DNA다. 역사적으로 시대를 뒤흔든 위대한 자취를 남긴 예술가들은 예외 없이 창의적 사고와 의심하기, 비틀어 보기, 관습과 기득권에 대한 저항과 역발상의 소유자들이었다.
에두아르 마네. ⓒNadar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회화, 조각, 건축, 과학, 해부학 등 다방면에 걸쳐 천재성을 발휘한 르네상스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년경~1519), 선과 면만 가지고도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차가운 추상화’의 창시자 피트 몬드리안(1872~1944), 주체할 수 없는 내면의 불같은 감정과 영혼을 그린 반 고흐(1853~1890), 앞, 뒤, 위, 아래, 좌, 우 다방 면에서 관찰한 동시성 이미지들을 기하학적으로 융합한 입체주의를 집대성한 피카소(1881~1973)…….
19세기, 프랑스 화단을 들쑤시며 이단아 취급을 받은 에두아르 마네도 예술가의 전형(典型)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마네가 활동하던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살롱전에서 두각을 나타내야만 했다. 파리 살롱전은 화가로서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이 보장되는 당대 최고 권위의 등용문이라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다투어 참여하던 선망의 무대였다. 살롱이라는 명칭은 전시장소인 살롱 카레(사각형의 방)에서 유래됐다.
기득권의 벽은 높았다. 31살이던 1863년,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라는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으나 심사위원들의 거센 비난과 함께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그림은 화창한 날씨의 대낮 숲속에 양복 입은 두 신사와 벌거벗은 여인이 여유롭게 앉아 담소를 나누는 내용이었다. 낙선 이유는 그림이 지나치게 퇴폐적인데다 회화의 기본 원리인 원근법도 지키지 않는 등 심사대상에 오를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캔버스에 유화, 208 x 264.5cm, 1863, 오르세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렇다고 낙담만 하고 있을 마네가 아니었다. 평소 미적 기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적이라는 전위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마네는 가만있지 않았다. 살롱전에서 떨어진 작품들을 모아 전시하는 낙선전에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내걸었다. 반전(反轉)이 일어났다. 마네 그림에 대한 반향은 뜨겁다 못해 폭발적이었다. 특히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살롱 심사위원들로부터 외면당한 혈기 왕성한 젊은 화가들이 마네의 그림에 열광적이었다.
이들은 훗날 19세기 미술사조 중에서도 혁신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 인상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논란거리가 될 하등의 여지가 없지만, 당시로서는 성경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이상적으로 묘사한 누드화의 전통에 반한다는 비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마네는 바로 이 지점에서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미적 평가와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는 시대정신과 호흡을 같이 할 때 진정성이 드러난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림은 일체 관습적이고 제도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그림 그 자체의 본질에 충실할 때 비로소 예술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가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닌, 현실 속의 인물을 그린 것도 이 때문이다.
마네의 도전은 2년 후인 1865년 또 한번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살롱전을 통해 알려진 ‘올랭피아’라는 작품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매춘부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채, 당당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이 그림은 당연히 저질과 외설 논란의 중심에 섰다. 정작 마네는 “나는 이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세계에서 본 대로 그린 것일 뿐”이라고 태연하게 대꾸해 관람객과 평론가들의 부아를 돋웠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캔버스에 유화, 130.5 x 190cm, 1863, 오르세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두 차례의 전시로 프랑스 미술계를 뒤흔든 마네는 1866년 또 하나의 문제작을 살롱전에 선보인다. 출품작은 ‘피리 부는 소년’, 결과는 역시 낙선. 원근감도 없고 입체감도 없는, 그림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평가였으나 마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에밀 졸라가 거세게 반박했다.
“……머지않아 우리의 후손들은 마네의 그림을 보고 감동할 것이다. 지금의 미술계 실세들의 그릇된 눈으로는 마네 그림의 진가를 알아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마네는 1883년 4월 매독 합병증으로 5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듬해 개최된 마네 추모 전시의 도록 서문도 에밀 졸라가 썼다. 추모전이 끝나자 마네의 그림 가격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피리 부는 소년
1820~1830년대, 사진의 발명으로 대상의 재현에 뿌리를 둔 회화의 역사는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광학 원리를 이용해 실물을 원형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진 앞에서 그림이 간직한 종전의 부가가치는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란 말이 있듯이, 화가들은 새로운 회화의 부가가치를 찾아 나섰다. 사진의 등장은 결과적으로 근대미술이 현대미술로 나아가는 전기(轉機)를 제공했고, 인상주의는 그 선두에서 맹활약한 대표적인 미술사조다. 인상파 화가들 스스로 대부로 받들며 존경한 마네의 그림 ‘피리 부는 소년’은 그런 점에서 현대미술의 태동을 알리는 메신저 성격의 작품이다.
에두아르 마네, 피리 부는 소년, 캔버스에 유화, 160.5 x 97cm, 1866, 오르세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 작품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그림의 배경이 없다는 점이다. 바닥도 없다. 배경과 바닥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없이, 소년의 주위를 온통 회색 조의 공간만이 에워싸고 있다. 어디가 배경이고, 어디가 바닥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피리를 불고 있는 소년의 모습도 특이하다. 검은색, 붉은색, 흰색, 노란색 네 가지 색만 강렬하게 드러나고 바지 옆을 장식한 검은색 긴 띠 형태의 윤곽선만 뚜렷할 뿐, 소년에게서 그 어떤 입체감과 질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인형 만들기’ 게임처럼, 소년을 그린 종이를 오려 캔버스에 붙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3차원의 공간감과 양감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평면적인 종이 캐릭터 소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당대의 미술 철학을 신봉한 살롱전 심사위원들이 어이없어할 만도 하다. 그런데 이 그림의 평면성은 새로운 미술을 꿈꾼 마네가 의도한 것이고, 그것이 현대미술을 잉태하는 군불이 되리라고는 권위적인 심사위원 누구도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마네가 이 그림에서 공간감과 입체감을 지우고 단순하게 평면성을 강조한 것은 사진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 전통적인 회화 정신을 회화 본연의 순수한 실체적 탐색으로 대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회화의 시작, 곧 색채와 선과 면의 근원적 조화를 통한 회화의 오리지낼러티를 추구한 것이다. 마네의 시도는 훗날 점, 선, 면, 색으로 구성된 추상미술이 탄생하는 중요한 동력(動力)으로 작용했다. ‘피리 부는 소년’이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적인 작품인 이유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이 그림은 평면성을 부각했으면서도 배경과 바닥의 흔적을 지우다시피 단조로운 회색 일색으로 처리하고 정면에서 소년을 향해 빛이 비치는 구도를 선택함으로써 인물을 강력하게 클로즈업하는 효과를 낳았다. 전통 회화의 원리를 무시했음에도 소년이 진짜 살아서 피리를 불고 있는 것처럼 생동적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마네가 위대한 화가인 이유다.
‘피리 부는 소년’은 1986년 오르세미술관 개관 때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전된, 오르세미술관의 간판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