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뭉크, 사춘기
에드바르 뭉크(1863~1944)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성장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아기와 청소년기는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영향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내면의 의식과 생각이 말을 지배하고, 그 말은 또 일란성 쌍둥이처럼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런 말과 행동이 쌓이고 쌓여 세월이 흐르면서 가치관으로 굳어지고 나아가 삶의 궤적을 결정짓는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식과 생각은 인간의 사고와 행위 체계의 요람(搖籃)이며 의식과 생각의 잉태와 완성에는 성장환경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에드바르 뭉크. ⓒAnders Beer Wilse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우리가 알고 있는 화가 중 에드바르 뭉크도 어릴 때의 가정환경의 그림자가 평생의 작품 세계에 드리워져 있다. 뭉크 작품의 키워드라 할 수 있는 ‘삶과 죽음’, ‘고독과 불안’, ‘절망과 고통’은 어린 시절에 겪은 불행한 가족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 북부지방 로이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의관이었으나 주류 의사는 아니었다. 첫 번째 불행은 뭉크가 다섯 살 때 일어났다. 어머니가 서른의 꽃다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이다. 5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이었던 코흘리개 뭉크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뭉크의 아버지에게도 우울증으로 타격을 입혔다. 5남매의 첫째인 뭉크의 누나 소피에도 겨우 6살에 불과해 어린 다섯 남매는 당연히 정서적인 공황기에 빠져들었다.
우울증에 따른 아버지의 신경 발작 증세는 남매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곤 했는데 뭉크 나이 14살 되던 해,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왔다. 한 살 위 누이가 어머니와 같은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예민한 사춘기 때 들이닥친 누나의 죽음은 가뜩이나 칠흑같이 어두운 뭉크의 자의식에 결정타를 날렸다. 유아기 때부터 시달려온 죽음에 대한 공포는 누나의 급사(急死)에다 뭉크 자신의 잦은 병치레까지 악재로 작용하면서 임계점을 넘고 말았다. 이제, ‘죽음’이라는 단어는 뭉크의 자의식 한복판을 지배하는 일생일대의 화두가 됐다.
뭉크는 실제로 누나가 세상을 떠난 지 8년 후인 1885년 ‘병든 아이’란 제목의 유화 그림을 그렸는데, 죽음을 눈앞에 둔 누나의 모습을 되살린 작품이다. 이때부터 죽음과 불안, 고독과 절망, 슬픔과 불행은 뭉크의 작품 세계 전반을 꿰뚫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 잡았다. 훗날 뭉크는 ‘병든 아이’는 자신의 예술세계의 출발점이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가장 잘 드러낸 그림이라고 여러 차례 고백한 바 있다.
뭉크를 괴롭혀온 죽음에 대한 공포는 끈질기다 못해 잔인했다. ‘병든 아이’를 그린 지 4년 후인 1889년 아버지가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오랜 세월 정신병을 앓던 여동생도 뭉크 곁을 떠나간 데 이어 남동생마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 91x73.5cm, 판지에 유채, 템페라, 파스텔, 1893,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뭉크, 하면 떠오르는 그림 ‘절규’(1893)는 뭉크가 얼마나 공포감에 휩싸인 채 고독하고 불안한 삶 속에 놓여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세기의 걸작이다. 그림에 대한 아무런 지식과 안목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끝없는 공포심을 느끼게 되는 ‘공포’ 그림의 상징이다.
‘절규’가 세상에 나온 지 1년 뒤, 뭉크는 또 하나의 유명한 그림을 선보인다. 바로 사춘기 소녀의 수줍음과 불안감을 강렬한 표현주의 방식으로 화면에 담은 작품 ‘사춘기’다. 이팔청춘 사춘기 소녀의 심리적 특징을 이보다 더 잘 시각적으로 드러낸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 ‘절규’와 마찬가지로 ‘사춘기’ 그림도 보는 순간, 태어나서 처음 겪는 신체적 변화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앳된 소녀의 이차성징(二次性徵)이 확 와 닿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었던 뭉크는 대인관계에서도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타인과의 소통은 먼 나라 얘기였다. 1944년 1월 23일 뭉크가 사망한 뒤 공개된 그의 집안 풍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엄청난 수의 작품들이 유물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1천여 점이 넘는 유화 작품과 4천4백여 점의 드로잉, 700여 점의 판화작품 외에 상당량의 사진과 친필일기가 발견됐다. 이 모든 것들은 뭉크의 유언에 따라 노르웨이 오슬로시 당국에 기증됐다. 뭉크가 죽은 지 19년이 되던 1963년, 마침내 오슬로 뭉크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사춘기(Puberty)
이 작품의 최초 유화 버전은 따로 있다. 뭉크는 ‘사춘기’라는 제목의 그림을 원래 1886년에 처음 그렸다. 그러나 1890년 이 그림은 불에 타 없어지는 바람에 1894년에 다시 그리기 시작해 1895년에 완성한 것이다. 그림의 내용만큼이나 이력 또한 극적이다. 표현주의 화가인 뭉크의 화풍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히는 ‘사춘기’는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장해가는 길목에서 드러나는 신체적 변화의 시작과 그에 따른 심리적인 불안감, 두려움을 가장 실감 나게 표현한 그림이다.
에드바르 뭉크, 사춘기, 캔버스에 유화, 151.5 x 110cm, 1894-1895.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 작품이 사춘기 소녀를 모델로 한 그림 중 단연 첫 손에 꼽히는 이유는 두 가지, 소녀의 자세 및 모습과 화면 오른편으로 길게 드리워진 커다란 검은 그림자 때문이다. 긴 갈래머리를 한 앳된 모습의 소녀가 알몸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어깨를 웅크린 채 양손을 X자로 엇갈리게 포개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수줍음에 어쩔 줄 몰라 웅크린 어깨와 엇갈리게 포개 방어적인 자세를 나타낸 양손, 아직은 성숙이 덜 된 듯, 살짝 봉긋한 가슴, 특히 오른손 아래 왼손으로 자칫 드러날지도 모를 가장 은밀한 신체 부위를 결사적으로 감추려는 듯한 결연한 의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잔뜩 힘을 줘 밀착시킨 양 무릎과 양발도 마찬가지. 소녀의 모습과 자세, 표정만으로 사춘기 소녀만이 지닌 독특한 아우라를 절묘하게 시각화했다. 세로 151.5cm, 가로 110cm의 그림 크기에서 알 수 있듯, 그림 속 인물이 실물 크기로 그려진 점도 사춘기 소녀의 절묘한 시각화를 가능케 한 요소다.
그러나 이 그림의 백미는 소녀 뒤로 커다랗게 보이는 괴상하게 생긴 시커먼 그림자다. 말이 그림자이지, 빛의 대비가 전혀 없이 칠흑처럼 새까맣게 칠해진 이 형체는 갑작스레 다가온 신체 변화에 놀라 앞날이 불안하고 두려운 소녀의 마음 그 자체가 아닐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불안한 법, 뭉크는 기이하게 생긴 그림자 모양의 이 형상으로 사춘기 소녀가 맞닥뜨린 이차성징에서 비롯된 불안하고 초조한 심리상태를 이상적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그림자가 소녀의 왼쪽 허리와 몸통, 겨드랑이와 밀착한 모습이 그녀의 몸속에서 새어 나온 것처럼 보이는데, 이 또한 그림자가 소녀의 불안하고 막막한 현재를 상징하는 뭉크 특유의 표현주의식 장치라 할 수 있다. 화면 전반을 짓누르고 있는 무겁고 투박한 느낌의 색채와 거친 붓 터치도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데에 안성맞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