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프란시스코 고야, 옷 벗은 마하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
우리가 다 아는 불세출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조국은 스페인이다. 다작(多作)에 무병장수에 화려한 명성에 여복(女福)까지 축복으로 충만한 삶을 누린 피카소는 모든 화가의 선망이었다. 죽은 지 50년이 다 돼 가는데도 현대미술 곳곳에 그의 흔적이 넘쳐난다. 살아생전 거의 모든 미술 장르를 두루 섭렵했던 피카소는 오늘날 설치미술로 불리는 전위적인 작업을 이미 80년 전에 선보였다.
1942년, 피카소는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를 거꾸로 뒤집어 결합한 설치작품 ‘황소 머리’를 세상에 내놓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설치작품은 이보다 앞서 1917년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이용한 작품 ‘샘’이나 1938년 갤러리 보자르에서 열린 파리 국제초현실주의 전(展)에 등장한 1,200개의 석탄 자루가 있었지만, 지명도와 영향력에서 ‘황소 머리’를 쫓아가지 못한다.
프란시스코 고야, 옷 벗은 마하, 캔버스에 유화, 98x191cm, 1775-1800, 프라도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초현실주의, 하면 생각나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도 스페인 북동쪽 끝자락 피게라스에서 태어나 피게라스에서 숨을 거뒀다. 피카소와 달리가 스페인이 낳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양대 거장이라면, 프란시스코 고야는 18세기 스페인 근대회화의 등불과 같은 존재였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한 고야는 유화 그림뿐 아니라 80여 점의 동판화로 구성된 유명한 판화집 ‘카프리초스’(스페인어로 변덕이란 뜻)로 대표되는 판화가로도 이름을 떨쳤으며 미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역사기록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고야의 위상을 굳힌 단 한 점의 그림을 꼽으라면 단연 ‘옷 벗은 마하’다. 고야의 그림 중 역대급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는 이 작품은 1795년 무렵 착수해 1800년에 완성됐다. 특히 작업기간이 콜레라 후유증으로 청각상실의 고통을 겪던 때와 겹친다는 점에서 고야의 투혼이 놀랍다. ‘옷 벗은 마하’가 처음 공개되자 스페인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제목처럼 그림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성이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침대에 드러누워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나의 알몸을 마음껏 감상이라도 하라는 듯이 유방에서 배꼽 아래 은밀한 부위를 거쳐 발가락 끝까지 부끄러움 없이 내보이고 있는 자세가 발칙하다. 우리를 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나 당당해 오히려 보는 이를 당황케 한다.
서양미술에서 여성의 누드는 흔한 그림이다. 그러나 종전의 누드화는 신화나 종교 속에 등장하는 여신의 모습을 신비하고 이상적인 자태로 묘사했지만, 고야가 그린 ‘옷 벗은 마하’ 속 여성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실제 인물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누드 그림 속 주인공을 현실 속의 일반인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금기 중의 금기. 게다가 스페인은 윤리적인 잣대가 엄격한 정통 가톨릭 국가라 고야의 그림은 기성세대들에게 반(反)사회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거센 저항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2세기를 훌쩍 거스른 아득한 옛날, 철옹성 같던 누드화의 전통 규범을 깨고 전설 속 이상화된 인물이 아닌, 실제 사람이 전면에 등장하는 새 시대의 팡파르를 고고하게 울린 고야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진정한 개혁주의자가 아닐까.
고야는 스페인 동북부 지역의 시골 마을 푸엔데토도스 출신이다. 하늘이 내린 예술적 재능이 남달랐던 그는 14살 때부터 미술 도제 수업을 받으며 화가의 길을 내디뎠다. 20대 중후반 궁전 장식용 태피스트리와 성당 제단화 작업에 참여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때의 인연으로 왕실 초상화를 그리는 행운을 거머쥐며 승승장구 끝에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마침내 왕실 궁정화가로 임명됐다. 고야의 왕실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카를로스 4세의 가족’(1800~1801)이다.
17세기를 풍미한 스페인의 선배 화가 벨라스케스(1599~1660)를 흠모한 고야는 벨라스케스 사후 유럽 미술계의 변방으로 전락한 스페인 회화가 근대미술로 나아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화가들에게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였던 고전적인 스타일을 과감히 버리고 실험적이고 주관적인 붓 터치를 시도한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화풍은 19세기 후반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옷 벗은 마하
마하(maja)는 스페인어로 옷 잘 입는 멋쟁이 여성이란 뜻이다. 서양미술사에서 신화 속 여신(女神)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실재 사람을 모델로 그린 최초의 등신대(等身大) 여성 누드 그림이다. 여성 누드 그림의 금기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미술사를 새롭게 쓴 고야는 어떻게 이 그림을 그리게 됐을까? 이 그림은 당시 카를로스 4세 국왕(1748~1819)의 최측근으로 스페인 총리이자 세도가였던 마누엘 고도이(1767~1851)의 주문으로 그려졌다는 게 정설이다. 문제는 그림 속 실제 모델이 누구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델의 신원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으며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확실한 것은 모델이 현실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진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옷 입은 마하, 캔버스에 유화, 95x190cm, 1800-1807, 프라도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미술사적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 그림의 모델 후보로는 스페인의 명문 귀족 가문인 알바 가문의 알바 공작부인이 꼽힌다. 그런데 그림을 주문한 고도이 총리와 알바 가문이 정치적인 앙숙 관계라는 점에서 쉽게 수긍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알바 공작부인이 유력한 후보로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녀가 고야와 애인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는 고야가 그린 두 점의 알바 공작부인 전신(全身) 초상화를 들 수 있다.
1795년에 그린 첫 번째 작품. 이 작품에서 공작부인이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을 따라가면 이런 글귀가 보인다. ‘알바 공작부인에게, 프란시스코 고야가.’ 2년 후인 1797년 그림은 더 노골적이다. 공작부인이 오른손 중지에 끼고 있는 반지에 ‘알바’ 이름이 새겨져 있고, 검지에 낀 반지에는 ‘고야’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공작부인의 오른손 집게손가락 아래 땅바닥에 ‘오직 고야뿐’이라는 일편단심의 애틋한 마음을 드러낸 글자가 쓰여 있다.
‘옷 벗은 마하’ 속 여성의 얼굴이 공작부인 초상화와 닮았다는 세간의 입방아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알바 가문의 후손들은 공작부인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희대의 해프닝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공작부인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과 유전자 감식작업을 단행해 얼굴 모습 복원을 꾀한 것이다. 이 또한 과학적인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니 ‘옷 벗은 마하’의 유명세만 더욱 높아졌다. 1940년대 중반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지금이 1800년이라고 가정하고 이 그림을 다시 보자. 외설적인가, 신성모독인가, 누드 그림의 혁명인가. 참고로 고야는 동일 인물에 동일 자세로 옷 입은 것만 다른 ‘옷 입은 마하’(1800~1807)도 그렸는데, 두 작품은 나란히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에 소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