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⑰옛모습 그대로인 암스테르담 구시가지
과거를 떠나(革) 미래로 나아간(新) 화가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⑰옛 모습 그대로인 암스테르담 구시가지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암스테르담 환(環) 운하 지역(구시가지).
ⓒAmsterdam Municipal Department for the Preservation and Restoration of
Historic Buildings and Sites(bMA)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얼마 만인가, 암스테르담 땅을 밟는 순간 아득한 옛날 추억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생전의 기억이 강렬해서일까, 젊어서 이승을 등진 아쉬움 때문일까. 과거에 대한 회상이 현실의 풍경을 가로막는 사이, 암스테르담 구시가지에 도착했다.
이럴 수가, 구시가지를 먼발치에서 바라본 나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살아서 본 모습과 너무나 똑같아 과연 지금이 2023년이 맞는지,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세상과 이별한 지 130년도 더 지난 오늘의 구시가지가 어떻게 옛 모습 그대로일까,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구시가지는 내가 태어나기 2세기 전인 17세기에 굴착된 대형 운하 3개를 중심으로 총연장 100km에 이르는 동심원 모양으로 감싼 형태다. 환(環) 운하 지역으로도 불리는 구시가지는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고 수행원이 귀띔했다.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오래된 13세기 건축물인 구 교회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암스테르담 신 교회. ⓒDiego Delso, License CC-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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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 이름은 1270년대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암스텔강 양쪽 기슭에 제방을 쌓아 만든 암스텔 댐에서 비롯됐다. 구시가지는 약 400년 전 중세시대에 축조된 댐에 기원을 둔 유구한 도시답게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감회에 젖어 느린 걸음으로 좌우를 살피고 있는데, 낯익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1213년경에 건축된 암스테르담 구 교회가 나를 반기는가 싶더니, 1408년에 완공된 암스테르담 신 교회도 위풍당당한 모습 그대로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영화(榮華)가 투영된 암스테르담 시청사였다가 1808년 네덜란드를 점령한 나폴레옹 황제(1771~1821, 재위 1804~1814, 1815)의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1778~1846, 네덜란드 국왕 재위 1806~1810)가 거처로 사용하면서 왕궁으로 성격이 바뀐 암스테르담 왕궁과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한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인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도 생전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영화(榮華)를 간직한 암스테르담 왕궁.
ⓒDiego Delso, License CC-BY-SA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특히 암스테르담 왕궁은 외벽이 황금색 사암(砂巖) 석재로 건축돼 일조량에 따라 색다른 모습을 연출하는 외관 풍경이 일품인데, 지금 봐도 장관이다. 암스테르담을 드나드는 관문인 암스테르담 중앙역은 내가 자살하기 1년 전에 개통했다는데, 생 레미에 머물던 시절이라 지금 처음 본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복잡한 내부 구조와 거대한 규모에 하루 이용객만 16만여 명이라는데, 19세기를 살았던 나로서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1889년에 개통한 암스테르담 중앙역. ⓒDiego Delso, License CC-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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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인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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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미술관으로 가려던 참에 수행원이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에 대해 들려주었다. 내가 죽고 49년이 지난 1939년 9월 1일에 발발(勃發)한 전쟁인데, 제2차 세계대전이란다.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2차 대전은 1945년 9월 2일 우키요에의 나라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끝났다고 한다. 미국, 영국이 중심이 된 연합국이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으로 구성된 추축국과 벌인 이 전쟁에서 군인이 2,400만 명, 민간인이 4,900만 명이 사망했다니,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지고 식은땀이 난다. 굳이 이런 얘기를 왜 할까, 원망스러운 눈길로 수행원을 쳐다보다가 이내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내 조국 네덜란드도 1941년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는데, 안네 프랑크(1929~1945)라는 독일계 유대인 소녀가 아버지, 어머니, 언니와 함께 숨어 지낸 집이 바로 이곳 암스테르담에 있다는 것이다. 안네 프랑크 가족과 다른 유대인 4명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1889~1980)가 운영하던 식료품 공장 창고에 1942년 7월부터 2년 동안 은신해 있다가 1944년 8월 4일 밀고자에 의해 나치 경찰에 전원 체포됐다. 안네의 아버지만 살아남았고, 안네를 포함한 7명은 수용소에서 죽거나 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안네 프랑크의 집. ⓒAnk Kumar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안네는 나치 독일의 눈을 피해 숨어 살던 2년간 일기를 남겼는데, 1947년 유일한 생존자인 아버지에 의해 출판돼 세상에 알려졌다. ‘안네의 일기’로 알려진 이 일기는 전 세계 60개 언어로 번역돼 3천 2백만 권이 팔렸다니, 오베르 공동묘지로 돌아가기 전에 나도 한번 꼭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안네 일가가 숨어 살았던 식료품 공장 건물은 1960년 5월 3일 박물관으로 개조돼 개관한 뒤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단다. 안네의 육신은 사라지고 없어도 안네의 이름과 흔적은 영원하리라 생각하면서, 안네 프랑크의 집을 둘러보았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혼자 상념에 잠긴 사이 수행원이 내 팔을 잡으며 소리쳤다.
“선생님, 앞에 보이는 저 건물이 반 고흐 미술관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