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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환생(還生) 여행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⑱반 고흐 미술관 앞에 서다

by 박인권

과거를 떠나(革) 미래로 나아간(新) 화가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⑱반 고흐 미술관 앞에 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밝은 하늘이다. 눈이 부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건물 외벽에 돌출된 VAN GOGH MUSEUM 글자가 선명했다. 내 이름을 내건 국립미술관이라니, 감개무량(感慨無量)하다. 한편으로 이게 무슨 영문인가, 라고 스스로 물었다. 지지리 복도 없고 무명(無名) 화가에 불과했던 내가 국립미술관 타이틀의 주인공이라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내 심정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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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미술관 전경. 왼쪽에 보이는 타원형 건물이 1999년에 새로 지은 부속 전시관이다. ⓒSilva.1994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정녕 이런 게 예술의 민낯인가. 빛보다 빠르게 37년 인생 행적이 뇌 회로를 따라 몇 바퀴나 돌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지러웠다. 나도 모르게 풀썩 주저앉았다. 수행원이 건네준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아까 수행원이 건네준 책자가 생각났다. 가방 속에서 꺼낸 책자는 반 고흐 미술관 안내 도록이었다. 호화 양장본으로 제작된 두툼한 도록에는 컬러로 인쇄된 내 그림 수백 점이 실려있었다. 그림마다 자세한 설명이 딸려 있고, 나의 작업 세계를 해설한 평론가 글과 삶에 대한 평가, 시기별 작품의 특징 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가운데가 위로 뻥 뚫린 반 고흐 미술관 내부..jpg

가운데가 위로 뻥 뚫린 반 고흐 미술관 내부.

ⓒHajotthu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다시 미술관을 바라보았다. 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본관과 타원형 형태의 3층짜리 부속 건물로 이뤄져 있었다. 미술관에는 내가 10년 동안 그린 유화 작품의 4분의 1 수준인 200여 점의 회화와 500여 점의 소묘, 내 동생 테오(1857~1891)와 주고받은 육필 편지 컬렉션이 체계적이고 정갈하게 전시돼 있었다. ‘고흐 작품 연구의 요람(搖籃), 반 고흐 미술관’이라는 안내 책자의 표제(標題)가 실감 났다. 내가 태어난 지 120년 만에, 죽고 나서는 83년이 흐른 1973년에 개관했다는 반 고흐 미술관은 세계 최대 규모의 고흐 컬렉션을 보유한 곳이란다. 내가 남긴 예술적 자산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나도 놀랐다. 오베르에서 홀연히 세상을 등진 나의 영혼은 무덤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각에 온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생전의 광기(狂氣)와 다시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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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미술관 내 뮤지엄 숍. ⓒG.Lanting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정녕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인가. 예술이 길다는 것은 예술의 수명은 끝이 없어 무한하다는 것인가. 무한함은 곧 한계가 없다는 말, 멈춤이 없는 무한진행형은 완결(完結)에 몸을 내주지 않는다. 이는 예술은 근원적으로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 고로 더는 오를 곳이 없는 만개(滿開)를 뜻하는 예술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남긴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년경~기원전 370년경)는 고대 그리스의 의사였다. 그 시절, 의술(醫術)은 기술(技術)의 다른 이름으로 예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술에는 종착역이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사람의 몸과 질병의 변화무쌍함을 인간이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술의 미완성은 숙명적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존재는 불완전하다. 인간도, 예술도, 지구도, 태양도, 자연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잠시 전시실 중앙에 친절하게 놓인 관람 편의용 보조 의자에 몸을 맡겼다. 이 많은 유작과 기록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의문의 빗장을 해제한 결과는 앞서 ⑮편(세상에 이럴 수가)에서 일부 언급한 대로였다.

반 고흐 미술관 탄생의 3대 주역이라는 테오와 제수씨 요한나 봉어(1862~1925), 조카 빈센트 빌렘(1890~1978)이 은인(恩人)이었다. 영광스럽게도 내가 환생 여행에 초대받게 된 것도 다 이들 덕분이라 여기서 다시 감사하다는 뜻을 전해야겠다. 알다시피 편지쓰기는 그림과 함께 내가 자존감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현실 통로였다. 그까짓 편지가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테오는 내가 보내고 자기가 내게 보낸 육필 편지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꼼꼼하게 보관해 훗날 내 이름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된 서간집이 세상에 나오도록 한 고맙고 또 고마운 존재다. 편지 하나도 애지중지했으니, 팔리지 않아 처박아 놓은 900여 점의 그림 간수야 말해 무엇할까.

못난 형에 대한 동생의 헌신적인 사랑이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걸까. 내가 죽고 6개월 만에 남편을 떠나보낸 제수씨 요한나 봉어는 젖먹이 아들과 단둘이 남겨진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꺼져버린 시아주버니의 예술적 불씨를 회생시킨 대규모 회고전 개최에 이어 서간집 출간과 서간집의 영문판 간행을 성사시킨 여걸 중의 여걸이었다.


1885년 4월 9일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jpg

1885년 4월 9일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 오른쪽 아래에 고흐의 첫 번째 걸작으로 평가받는 ‘감자 먹는 사람들’ 스케치가 보인다.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동생과 제수씨의 희생정신을 이어받은 조카는 반 고흐 미술관 설립을 주도해 오늘날 내가 호사(豪奢)를 누리는 최고의 선물을 안겼다. 생전에 단 한 번도 터지지 않은 나의 복(福)을 테오~요한나 봉어~빈센트 빌렘 셋이서 바통 터치하듯 대박을 터뜨렸으니, 지금 나는 로또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다.

반 고흐 미술관 전시실 내부를 다 둘러본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림에 매달린 10년 세월의 풍상(風霜)을 어쩜 이렇게 거짓말처럼 소환시켜 놓았을까. 주요 시기별 작품이 망라돼 있고, 작가 노트 이상의 의미가 있는 편지 컬렉션에다 내 삶을 조망한 각종 자료와 기록물을 보니, 시간의 나이테에 가려져 잊고 있던 지난날들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조금 과장하면 전작(全作) 도록(圖錄), 카탈로그 레조네를 실물로 보는 것 같다. 다시 조카 생각이 났다. 반 고흐 미술관이 설립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조카이기 때문이다. 반 고흐 미술관 건립은 1962년 반 고흐 재단이 설립되면서 가시화됐다. 이에 앞서 조카가 내 그림과 드로잉, 습작, 편지, 기타 자료 등 소장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고흐 컬렉션 전부를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영구 대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카도 사람인데, 어찌 물욕(物慾)이 없었겠냐만, 기꺼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다운 명예로운 길을 선택해 큰아버지를 영원히 살게 했으니 목이 메어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재단이 설립된 해에 네덜란드 의회는 고흐 컬렉션에 대한 정부 차원의 매입을 승인했다. 매입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미술관 건립을 내건 유족의 뜻에 따라 1963년 설계와 함께 공사가 시작됐다. 마침내 1973년 6월 착공 10년 만에 반 고흐 미술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옛말이 떠올라 와락 눈물샘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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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조카 빈센트 빌렘. ⓒRon Kroon / Anefo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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