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⑲마지막 여행지, 크뢸러 뮐러 미술관
과거를 떠나(革) 미래로 나아간(新) 화가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⑲마지막 여행지(旅行地), 크뢸러 뮐러 미술관
크뢸러 뮐러 미술관. ⓒVelvet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제 정해진 일정은 다 끝났다. 천성(天性)이 급하기도 했지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귀하디귀한 기회라 힘든 줄도 모르고 여정(旅程)을 강행한 덕분에 오베르 행 타임머신 탑승 시간까지는 거의 하루나 남았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수행원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혹시 선생님의 천재성을 알아본 최초의 컬렉터가 누군지 아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생전에 내 그림을 찾는 컬렉터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던 터라 나는 그저 수행원의 눈만 멀뚱히 쳐다봤다. 그녀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 설립의 주역인 헬렌 크뢸러 뮐러(왼쪽) - 안톤 크뢸러 부부. 1888년경에 찍은 모습이다.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인 호헤 벨루에 국립공원 안에 크롤러 뮐러 미술관이 있는데 반 고흐 미술관 다음으로 내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1938년에 개관한 이 미술관의 설립자는 헬렌 크뢸러 뮐러(1869~1939)라는 독일의 여성 미술품 수집가인데,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컬렉터라는 것이다. 헬렌은 1935년 1만 2,000점에 이르는 방대한 개인 컬렉션을 네덜란드 정부에 기증해 3년 후 크뢸러 뮐러 미술관이 문을 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헬렌의 개인 컬렉션 중 으뜸은 단연 반 고흐 컬렉션이다. 그녀는 내 이름이 미술계에 알려지기 이전인 1908년 초창기 작품인 ‘숲의 가장자리’(1882)를 시작으로 1929년까지 20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 91점의 유화와 180여 점의 소묘를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빈센트 반 고흐, 숲의 가장자리, 캔버스에 유채, 34.5 x 49cm, 1882년 8월,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녀는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이 익숙지 않던 때에 나의 예술성을 인정하고 그림을 전문적으로 수집한 첫 컬렉터로 기록돼 있다. 그녀는 당시로서는 위험천만한 투자를 왜 나에게 했을까. 그 해답은 수행원이 귀띔해준 그녀의 이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현대미술의 위대한 정신 중 하나다.
춥고 배고팠던 시기,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고, 세상을 향해 무수히 외쳤던 초라한 몰골의 나 자신이 떠올랐다. 테오와 제수씨, 조카에 더해 고마운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무명의 화가에게 기꺼이 손을 내민 헬렌 여사의 호의(好意)에 경의(敬意)를 표한다.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64.2 x 80.3cm, 1888년 6월,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서둘러 크뢸러 뮐러 미술관을 찾았다. 알고 보니 미술관을 품고 있는 호헤 벨루에 국립공원 땅도 헬렌 부부가 기증한 것이란다. 국립공원의 크기는 무려 55km²(1,663만 7,500여 평)로 실감이 나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만큼이나 헬렌 부부의 남다른 배포(排布)에 또 한 번 놀랐다. 헬렌은 독일 에센의 부유한 광산 철강 사업가 집안의 딸로 19살 때인 1888년 네덜란드 해운 광산업의 실력자였던 안톤 크뢸러와 결혼했다. 유럽 미술계 최초의 여성 수집가로 뛰어난 예술적 안목을 지닌 아내의 헌신적인 컬렉션을 물심양면으로 밀어주고 끌어준 안톤을 보면, 부창부수(夫唱婦隨) 대신 부창부수(婦唱夫隨)라고 해야 할까. 감동도 이런 감동이 또 있을까, 싶다.
빈센트 반 고흐, 프로방스의 건초더미, 캔버스에 유채, 73 x 92.5cm, 1888년 6월,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광활한 숲속에 자리한 크뢸러 뮐러 미술관은 평온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시작되는 조각 공원에서 미술관 정문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관람객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공용 자전거가 공원 곳곳에 비치돼 있었다. 낭만적인 미술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반가운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감자 먹는 사람들(1885)과 밤의 카페테라스(1888), 생폴 병원의 정원(1889), 씨 뿌리는 사람(1888), 프로방스의 건초더미(1888), 흰옷을 입은 숲속의 소녀(1882), 해변의 어부(1882), 해변의 어부의 아내(1882), 땅 파는 사람과 누에넨의 낡은 탑(1884), 정면에서 본 직조공(1884), 감자 심는 농부들(1884)……. 내 작품들은 반 고흐 갤러리라 이름 붙은 전시공간에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었다. 전시실은 모두 9개였고, 나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조르주 쇠라(1859~1891)를 비롯해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조르주 브라크(1882~1963), 장 뒤뷔페(1901~1985) 등 유명 작가들 작품도 있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내가 살아있을 때 태어났지만 어린아이들이라 내가 알 리가 없었고, 뒤뷔페는 내가 죽고 난 뒤 태어나 역시 나와는 인연이 없다.
9만 평이 넘는 조각 공원도 볼만했는데, 오귀스트 로댕(1840~1917)과 헨리 무어(1898~1986)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5 x 54cm, 1889년 4월,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제 나의 원래 자리, 오베르로 돌아갈 시간이다. 1890년 7월 29일, 이승을 마감했던 곳이자 새로운 삶의 다른 이름인 저승이 시작된 곳이다. 환생 여행의 추억을 뒤로 하고 타임머신에 탑승하려니, 아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몇 시간 후 무덤 속, 나의 영원한 안식처에 몸을 눕히기 전에 동생 테오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아우야 고맙다. 사랑한다.
여러분, 긴 글 읽느라 수고 많았고 고맙습니다.
2023년 1월 빈센트 반 고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