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벚꽃 감상기(鑑賞記)
날짜 : 2023년 4월 2일(일)
장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일대(충장체육공원 입구~행신역~강매역 입구 산책로)
만개한 벚꽃 나무의 위용
가까이서 본 벚꽃의 자태. 뽀얀 꽃잎과 빨간 속살이 사이좋게 조화를 이루며 눈을 유혹한다.
매주 일요일 오후 1시 무렵이면 시계추처럼 어김없이 걷기 운동에 나선다. 숨이 차오를 정도로 빠르게 동네 주변 산책로를 따라 걷고 집으로 돌아오는 행동은 루틴이 되어 이제는 몸이 자동으로 기억하는 습관이 됐다. 20년 넘게 살아온 아파트 후문 쪽으로 나가 행신동 충장체육공원 입구에 다다르면 왼쪽 길에서부터 산책로가 시작된다.
시트형 탄성포장재가 깔린 산책로는 숲길 사이로 이어지다 경의 중앙선 행신역 주차장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끊어진다. 주차장 앞 대로변 인도로 쭉 걸어가다가 행신역 끝자락에서부터 다시 숲속 산책로가 이어지는데, 강매역으로 올라가는 고가도로(高架道路) 입구까지 계속된다. 고가 아래쪽 하천 양옆으로도 다른 분위기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나는 고가도로 입구에서 방향을 바꿔 왔던 길로 다시 걷기 시작해 산책로 중간 두 곳에 마련된 운동기구로 몸을 풀고 집으로 돌아온다.
매주 반복되는 이 코스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오랜 경험에 따라 길지도, 짧지도 않게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내 몸 구석구석에 산책의 전 과정이 익숙하게 새겨져 있다.
4월 첫 번째 일요일 오후의 산책길은 특별났다.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기운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4월 초, 행신동의 낮 기온은 27도로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 했다.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이상고온(異常高溫)이라는 달갑지 않은 불청객은 뜻밖에도 때 이른 벚꽃 개화라는 기쁜 소식을 달고 와 상춘객(賞春客)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3월 마지막 날부터 갑자기 오른 낮 기온은 이날 전국적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례적으로 따뜻한 봄 날씨가 예년보다 일찍 활짝 웃는 벚꽃을 불러내 흥겨운 벚꽃 축제가 펼쳐진 것이다.
행신역 바로 옆 숲속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 나무 행렬
벚꽃 나무 사이사이로 강렬한 노란색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 개나리.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에 등장하는 노랑을 닮았다.
부산기상관측소가 개소된 이래 102년 만에 부산에서 가장 빨리 벚꽃이 핀 이날, 내가 사는 행신동 일대에도 벚꽃 향연을 즐기려는 인파로 물결을 이뤘다. 산책로로 들어서는 길목인 충장체육공원 입구 20~30m를 앞두고 새하얀 속살을 드러낸 벚꽃들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을 유혹하는가 싶더니, 다가갈수록 싱그럽고 풋풋한 봄 꽃잎 특유의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탄성포장재로 마감된 산책로 옆 나무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모래와 가는 자갈이 깔린 또 다른 비포장 산책길이 있다. 쏟아져 나온 상춘객들의 사열(査閱)을 받기라도 하듯, 나란히 줄지어 눈부신 군무(群舞)를 추고 있는 벚꽃 나무 대열의 모습을 쫓아 나도 평소와 달리 비포장 산책길로 내려갔다. 봄바람에 일렁이는 벚꽃 나무에서 흩날리는 꽃잎들은 프리스타일로 저마다 개성 만점의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눈이 즐거워지고 기분이 상쾌했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벚꽃잎 가까이 다가갔다. 눈앞에 또렷이 들어온 벚꽃잎의 몸매는 황홀했다. 우윳빛을 흠뻑 머금고 있는 뽀얀 꽃잎 안에 드러난 빨간 속살을 보는 순간, 난생처음 사랑하는 여인의 알몸을 목격했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한 송이 꽃도 이토록 세상에 이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세계에서는 왜 만물의 원수 같은 구린내가 끊이지 않을까, 라고 반성하며 가는 길을 재촉했다.
산책 도중 흥미로운 장면이 눈에 띄었다. 다른 친구들이 몰려 있는 줄기와 가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따로 꽃을 피운 벚꽃 다섯 송이를 발견했다. 자리다툼에서 쫓겨나 어쩔 수 없이 외딴곳에 둥지를 튼 것 같기도 하고, 무리와 어울리는 게 싫어 홀로서기에 나선 결과처럼 보이기도 하고, 천성적으로 남의 눈에 띄는 걸 좋아하는 관심종자(關心種子) 심보가 발동된 나머지 그렇게 된 것도 같은데 그도 저도 아니면 벚꽃 집단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겠다고 혼자만의 추측을 해 봤다. 어쨌거나 나에게는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언제나 변함없이 숲을 지키는 소나무의 몸체. 오랜 세월의 더께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흔적에서 소나무의 연륜이 느껴진다.
언제봐도 정겹고 삶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솔잎
벚꽃 나무 아래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모여 앉아 눈앞에서 벌어지는 벚꽃 잔치를 만끽하는 가족들, 온몸으로 봄이 왔음을 보여주는 벚꽃 나무의 넉넉한 인심에 웃음꽃을 피우기 바쁜 다정한 연인들, 벚꽃과 하나 된 지금, 이 순간의 추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부지런히 핸드폰 카메라 버튼을 눌러대는 중년의 여성들, 세상 모든 것이 즐겁고 신기한 코흘리개 꼬마 녀석들, 주인을 따라 봄나들이에 나서 덩달아 꼬리를 살랑대며 이곳저곳에 코를 들이댄 채 본능적인 세상 탐사에 열중인 강아지들, 나처럼 홀로 산책길에 나선 사람들…….
모두가 봄의 전령사,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의 춤사위에 홀려 들뜬 모습들이었다. 3년 전 전 세계에 들이닥친 코로나 쓰나미에 휩쓸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가슴앓이에 시달린 시민들이 모처럼 마스크에서 해방돼 자유와 여유로움 속에서 참다운 봄을 느끼는 풍경은 새삼 인간다운 삶의 의미와 행복을 떠올리게 했다.
인간에게 때마다 모든 걸 아낌없이 베푸는 자연의 섭리(攝理)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자연에 되돌려주었는가, 인간은 왜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려고만 하는가, 대자연의 순환 원리를 반의반만이라도 인간이 닮는다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세계의 권모술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정직하고 순수한 원형 그대로의 자취를 간직한 하늘이 내려준 선물, 벚꽃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숨 가쁘게 기록사진으로 남겼다. 핸드폰에 장착된 카메라 버튼을 누를 때마다 첫사랑의 감정처럼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줄기에서 홀로 떨어져 핀 벚꽃잎 다섯 송이. 무리가 싫어서 선택한 홀로서기일까,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깍쟁이 심보의 발로일까. 그도 아니면 영역 다툼에서 밀려난 외톨이의 숙명일까.
땅바닥에 떨어진 솔방울 3형제. 솔방울은 소나무의 종족보존 본능을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증거물이다.
모래와 가는 자갈이 깔린 비포장 산책로.
벚꽃 나무들이 인간들에게 내준 열병식(閱兵式)은 비포장 산책길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눈의 호사(豪奢)가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질 즈음, 행신역 주차장 앞 인도가 나타났고, 2분쯤 걷자 이번에는 탄성포장재가 덮인 산책로가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강매역 부근 고가도로 입구까지 숲속을 가로지르며 형성된 산책로 양쪽에도 벚꽃 행렬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아름다움을 뽐냈다.
보란 듯이 사방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벚꽃 나무가 연이은 숲을 이룬 경치가 장관(壯觀)이었던 비포장 산책로보다는 울림의 강도가 약했지만, 눈이 즐거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산책로를 걸어가는 내내 벚꽃 나무 사이사이로 개나리와 진달래도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고 인사했다.
숲속의 든든한 지킴이 소나무들도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사시사철 한결같은 마음으로 바위틈에서도 성장하는 강인한 생명력과 근친 수정을 교묘하게 피하는 슬기로운 종족 번식력은 소나무만의 카리스마다. 그런 점에서 소나무는 아버지의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어머니의 따스한 모성애, 두 가지를 다 가진 나무라 할 수 있겠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라는 소나무는 집을 짓거나 기차선로(線路)를 받치는 침목, 각종 도구 제작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만능 식물이다. 또한 소나무가 상처를 입었을 때 나오는 분비물로 천연수지의 하나인 송진(松津)은 약용과 공업용으로도 쓰이니, 실로 효자 나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소나무 꽃가루인 송홧가루는 명절 때 먹는 전통 과자인 다식(茶食)의 귀한 재료로 대접받고 있다니 소나무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마땅하다.
소나무 숲 아래에는 으레 소나무 열매의 송이인 솔방울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비늘을 닮은 잔 조각이 갈라져 둥글게 생긴 솔방울은 조각 조각의 틈새에 씨가 들어있다. 사이좋게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솔방울 세 개를 핸드폰 사진 앨범에 저장했다. 개인적으로 솔방울을 좋아한다. 생김새나 색깔, 습성이 자연 그대로의 날 것을 품어, 잊고 있던 초심(初心)을 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일요일마다 반복하는 오늘의 산책로 행보(行步)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또한 자연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생태계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일깨우는 계기로 다가왔다. 뜻깊은 하루였다. 변함없는 자연의 일편단심(一片丹心)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