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책취(冊臭)의 설렘
막 배달된 새 책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 눈도장을 찍어둔 참고서를 서점에서 사 집에 돌아오면 의식처럼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었다. 책상 위에 참고서를 올려놓고 두 손으로 책을 펼친 뒤 고개 숙여 한 번도 남에게 몸을 보여준 적 없는 책의 속살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확인 방법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후각으로 탐사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각(視覺) 대신 후각(嗅覺)으로 책의 속살을 어루만졌다.
나는 세상에 나온 뒤 누구에게도 몸을 내준 적 없는 새 책에서만 배어나는 책의 냄새, 책취(冊臭)가 좋았다. 책을 펼치면 누구도 밟은 적 없는 이른 새벽의 첫눈처럼 새 책 속지에서 나는 뽀얀 종이 냄새와 종이 위 글자가 글자다울 수 있도록 생명성을 부여한 특유의 잉크 냄새가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은 오랫동안 가슴 졸이며 기다리다 마침내 나에게만 몸을 허락한 책의 속살이 내뿜는 향기였다. 그 향기는 오로지 새 책에서만 소유하여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특권이었다.
새 책 앞에서 책장(冊張)을 열어젖히고 후각(嗅覺) 기능에 시동을 거는 순간, 그때까지 나를 옥죄던 일상의 스트레스는 거짓말처럼 내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에게 새 책은 연인, 새 책의 향내는 연인의 속살, 그것이었다. 내가 새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내가 새 책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 책을 버려본 적이 없다. 책과 한번 인연을 맺으면 그 인연은 언제까지고 계속된다. 이것은 내가 케케묵도록 오래된 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작이 반(半)이라고, 첫인상의 강렬한 매력이 나의 신뢰를 거의 저버리지 않은 점과 관련이 깊다. 내가 책에 대한 첫인상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주제에 대한 평소 관심과 선호도, 목차 구성의 충실성과 완성도, 저자에 대한 신뢰, 평단(評壇)의 평가 등이다. 후반부의 두 기준은 주관적 가치 판단의 기준이 다 다르고 의도적인 세몰이에 휩쓸릴 수도 있어 참고용으로만 여길 뿐, 전반부의 두 기준을 더 눈여겨본다. 책의 주제와 줄거리의 뼈대인 목차가 여물고 논리적으로 구성됐는지, 여부는 책 내용의 깊이와 넓이를 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믿음직한 거울이기 때문이다.
앞서 신뢰를 '거의' 저버리지 않는다고 표현한 데에는 딱 하나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책과의 인연이 도중에 끊어지는 경우인데, 책이 나를 버릴 때다. 첫인상에 반해 내가 선택한 책이지만, 막상 살펴본 책 내용이 첫인상과 어긋나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가끔 그런 일이 생긴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책과의 인연을 손절(損切)한다. 대개 번역서에서 이런 일을 겪는다. 그런 점에서 번역자는 또 다른 저자로 원서(原書) 집필자의 속내를 헤아리면서 원어(原語)와 우리말 사이에 놓인 이질적인 언어의 크레바스를 불굴의 의지와 초롱초롱한 기예(技藝)로 건너야 하는 고뇌의 연금술사라 할 수 있다.
나에게 새 책은 연인, 오래된 책은 조강지처(糟糠之妻)와 같다. 그런 점에서 나의 책 성향은 장서가(藏書家)를 닮았다. 책은 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읽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장서가의 정의를 나는 좋아한다. 정말이지 나는 책을 버리는 것을 싫어한다.
오래전 일화(逸話)가 생각난다.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의 일이다. 20여 년 전, 부모님은 30년 가까이 살았던 기와집에서 양옥(洋屋)으로 삶의 거처를 옮겼다. 기와집 다락방에는 초등학교에서 대학 시절까지 나의 손때가 묻은 교과서며 참고서, 전공 서적, 문제집과 노트에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세월의 무게를 끌어안은 먼지를 덮어쓰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삿짐을 싸던 중, 부모님은 다락방에서 막내아들과 세월을 함께 한 상당량의 서적류와 물건들을 발견했다. 보물처럼 애지중지했던 내 마음과는 달리, 부모님은 다락방을 차지하고 있던 물건들을 고물상에 넘겨버렸다. 대학 진학 후 줄곧 서울 생활을 한 나는 그 사실을 부모님이 이사한 집을 처음 찾은 날 알게 됐다. 고물상에 팔았다는 말에 나는 아연실색(啞然失色)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내 눈치를 보던 어머니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30년 만에 이사하는 참에 너무 낡고 오래된 물건들을 죄다 정리했다고 하셨다. 학창 시절 동고동락했던 내 분신들이 어디론가 영영 떠나버렸다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상실감은 꽤 오래갔다. 요즘도 가끔 그때 생각이 난다. 새 책을 앞에 두고 치르는 나만의 의식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책 버리기를 주저하는 편집증적 기질도 여전하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책 버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감할 것이다. 2003년 이른 봄, IMF가 터지기 직전에 처음으로 마련한 지금의 일산 아파트로 입주를 했다. 매매 계약 체결 후 전세를 놓고 다른 곳에서 살다가 이때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후 며칠이 지난 휴일 오후, 책장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정리 정돈에 예민해 책장에 꽂힌 책의 순서까지 꿰고 있는 터라 보여야 할 책들이 보이지 않자 당황스러웠다. 책이 너무 많아 집안이 복잡해져 임의로 헌책 수거함에 내놓았다는 집사람의 말에 망연자실했다. 어쩜, 부모님의 경우와 그렇게 쏙 빼닮았는지, 할 말을 잃었다. 이후에도 집안에 쌓인 책을 두고 집사람과 벌이는 실랑이는 수차례나 계속됐다.
나는 공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책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책의 독립적이고 포괄적인 공간점유성을 선호하는 반면, 집사람은 비어있는 공간 자체를 좋아하는 공간의 여백미(餘白美)를 강조해온 터라 둘 사이의 접점은 애당초 있을 리 만무했다. 점유와 여백은 서로 평행선을 달렸다. 겨우 타협한 게 앞 베란다 리모델링 공사 때 맞춤형 슬라이드형 책장을 주문해 넘쳐나는 책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때 꽤 많은 양의 책을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처분했다. 슬라이드 책장이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의 한계 때문이었다. 집사람은 홀가분 해했으나, 나는 속이 쓰렸다.
나는 또 남에게 책을 빌려주는 것을 싫어한다. 그 이유는 내가 책을 애인이나 조강지처처럼 극진하게 예우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책을 의인화(擬人化)한 주제넘은 표현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만큼 책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이유는 책을 빌려준 뒤 돌려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許多)하기 때문이다. 빌린 책을 돌려주지 않고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사람을 나는 많이 봤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고 무책임한 처사다.
그런데 빌려준 책을 떼였다는 것을 안 때에는 대개 세월이 한참 지난 후다. 큰맘 먹고 책장 정리를 한다거나, 문득 생각이 나 그 책을 찾을 때, 혹은 글을 쓰다가 그 책이 필요할 때가 그런 경우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신문사에 근무할 때였다. 미술을 담당할 때였는데, 문학출판 담당 기자의 갑작스러운 공백으로 그것까지 떠맡게 됐었다. 일주일에 수십 권씩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들이 책상 위와 책상 밑에 수북이 쌓였다.
원고 마감 후에는 내가 점찍어둔 책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을 누구든지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한쪽 공간에 따로 모아두고 있었다. 어느 날 후배 녀석이 내 개인 사물함에 넣어둔 몽테스키외의 3권짜리 시리즈 저작을 발견하곤, 며칠만 좀 빌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책을 내어 주었다. 꼭 돌려주겠노라고 단단히 다짐을 받아 둔 건 물론이었다. 오랜 경험상 애당초 빌려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간청(懇請)에 못 이긴 나의 잘못이었다. 돌려주겠다고 약속한 1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흐르자 책을 빌려준 사실 자체가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물함 정리를 하던 중에 그때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후배에게 그 말을 꺼내기가 민망했고, 꺼낸다 한들 분명 까마득한 옛일이라 책의 행방을 파악하기가 난망하다고 핑계를 댈 게 뻔해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비슷한 일은 여러 번 있었다. 모두 다 어쩔 수 없이 빌려줄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이 있었으나, 결과는 다 똑같았다. 누구라도 이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면 남에게 책 빌려주기를 꺼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금쪽같이 여기는 책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