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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거장에서

3.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들기의 참을 수 없는 어려움

by 박인권

요즘 들어 부쩍 새벽녘에 잠에서 깨는 날이 잦아졌다. 나이 탓인가, 이틀이 멀다, 하고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나이 들면 잠이 없어진다는데,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50대 후반이나 60줄에 이르면 이전보다 잠이 적어지면서 이른 새벽에 깨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의학 정보에 따르면 나이가 들어 잠이 적어지는 것은 신체 노화현상과 관련이 깊다. 육체 기능이 떨어지면 숙면(熟眠)이 힘들고 잠에서 자주 깬다는 것이다. 또 노인들은 생체리듬이 빨라져 초저녁에 잠이 많고 새벽 일찍 눈을 뜨게 된다.


내 경우는 조금 다른 게, 새벽에 깨기는 하지만 초저녁잠이 없고 수면시간의 총량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나는 대학 시절부터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타입이었다. 직장 다닐 때도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었다. 다만 직장인으로서 지각은 금물이기에 기상 시간은 빨랐다. 지금까지도 늦게 자는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가 얼마 전부터 새벽에 잠이 깨는 것만 바뀌었다. 깼다가 금방 다시 잠들어 전체적인 수면시간은 달라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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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술로 불리는 소주. ⓒKārlis Dambrāns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사람마다 생체리듬이 다 다르고 언제든지 예외라는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래의 주변 친구들을 봐도,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기상 시간도 빨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나는 평균적인 사례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스스로 새벽잠에서 깨는 원인은 생리현상에 있다. 오로지 배뇨기(排尿氣)가 잠을 깨우기 때문에 용변(用便) 후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든다. 수면시간의 총량은 그대로다. 깨는 것도 딱 한 번이다. 아침까지 숙면하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생기는 현상이라고 받아들이니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문제는 다른 이유로 잠을 깨는 데에 있다. 이를테면 새벽 1시쯤, 막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이나 잠이 든 초기 단계에서 방 바깥에서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경우 십중팔구 눈이 뜨인다. 기본적으로 예민한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내가 잠을 청하는 시간대가 남들보다 늦은 이유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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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따를 때 일어나는 풍성한 거품으로 주당들의 입맛을 돋우는 밀맥주. ⓒUkko.de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새벽 소음의 주범은 아들이다. 음주(飮酒)의 부전자전(父傳子傳)인지,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아들은 별난 버릇이 있다. 술 마시고 귀가한 날이면, 새벽 1시든 새벽 2시든 시간을 가리지 않고 꼭 무언가를 먹은 뒤 자는 게 루틴처럼 굳어졌다. 어쩌다 나도 가끔은 얼큰하게 취해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간단하게 요기(療飢)를 하기도 하지만 정말이지 어쩌다 일뿐이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기억이 더욱 또렷해지는지, 아들은 술 마신 날 자기 전에 꼭 음식을 찾는 자신만의 버릇을 단 한 번도 까먹는 일이 없다.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선잠을 깬 나에게는 참으로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알코올 기운만 들어가면 시장기가 발동되는 아들의 희한한 술버릇은 고장(故障) 나는 일도 없다. 애주가(愛酒家) 기질에다 고집 센 성격까지 나를 닮은 아들을 보면, DNA의 힘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대학 후배에다 군대(KATUSA)까지 같아 혈육의 정이 남다를 만도 한데, 부자간의 현실 세계는 영 딴판이다.


아들보다 4살 아래의 딸도 술을 웬만큼 마시는 편인데, 적당히 취기가 올라 집에 돌아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바로 잠에 곯아떨어진다. 사실 딸처럼 술 마시고 귀가해 바로 자는 스타일은 본인에게도, 다른 가족에게도 뒤끝이 없어 모범적인 음주 습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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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종류의 다양한 맥주. ⓒThayne Tuason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술을 좋아하는 내게도 술버릇이 있다. 나의 주량(酒量)은 일정하다. 1차는 소주, 한 병이 정량(定量)이다. 컨디션이 올라오거나 분위기에 취하면 한 병 반까지 주량이 늘어난다. 여하한 일이 있어도 그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 이런 나의 음주 습관은 오래됐다. 물론 젊었을 때의 주량은 고무줄처럼 밑도 끝도 없었다. 40대 중반부터 계속된 1차 소주 한 병 습관은 세 가지 이유에서 비롯됐다.


첫째는 내 몸에 무리가 가지 않고 다음 날 뒤끝이 없다는 점이다. 또 술이 술을 마셔 기억이 끊기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나만의 술자리 원칙에 가장 부합하는 양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소주 한 병에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을 때, 술기운의 감흥이 나를 가장 기분 좋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만의 술자리 3대 철칙을 고수하게 된 데에는 지난날의 무수한 시행착오에서 학습된 음주 교훈이 영향을 미쳤다.


누구나 자기만의 주량이 있듯이 내가 스스로 터득한 나의 주량은 소주 한 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몸이 견디고,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는, 술자리에서의 이 세 가지 나와의 약속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일 없이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다.


치기(稚氣)에 매몰돼 술을 이기려고 덤비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몸이 망가지는 것은 자기 몸이니,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지만 기억이 뇌에서 가출하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다. 자기 주량을 과도하게 넘어 소위 필름이 끊기면 다음 날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기억나지 않고 어떤 실수를 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지나친 음주로 인한 순간적인 기억상실증은 자칫 사고로 이어질 개연성이 다분(多分)하기에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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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안주의 대명사 볶음 땅콩. ⓒEric Freyssinge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나의 술버릇은 또 있다. 나는 술자리를 1차로 끝내는 일이 없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2차에서 끝나기도 하고, 3차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2차, 3차의 주종(酒種)은 맥주다. 젊었을 때 소주보다 맥주를 좋아한 이유도 있지만, 소주는 한 병이라는 나만의 주도(酒道)를 지키면서 알코올 도수가 약한 맥주로 취기(醉氣)도 달래고 술자리 흥도 돋우고 속마음을 터놓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2차에서 마무리하는 경우 맥주 주량은 1,000㏄ 또는 그 이상인데, 3차까지 가면 총량이 1,000㏄ 정도 더 늘어난다. 평균적으로 계산하면 소주 한 병, 맥주는 2,000㏄가량 되는 셈이다.


요즘에는 술 약속을 자제하는 편이라 일주일에 한 번꼴로 술자리에 나간다. 약속이 없는 날에는 자기 전에 수입 캔맥주 500㏄짜리 한 캔~두 캔쯤 홀짝인다. 소주 안주로는 특별히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맥주 안주로는 땅콩을 선호한다. 땅콩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너무 많아 따로 글을 이어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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