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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거장에서

4-1. 제주(濟州) 가족(家族) 여행기(旅行記) <上>

by 박인권

기간 : 2023년 3월 1일(수)~3월 3일(금)

장소 : 서귀포 및 제주시 일대

숙소 : 서귀포 KAL호텔

의미 : 환갑(還甲) 기념 겸 딸 대학 졸업 축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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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KAL호텔 정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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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KAL호텔 정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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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KAL호텔 뒤 바닷가


가족여행을 맞아

양력 기준으로 2023년 1월 12일 환갑을 맞았다. 결혼 전에는 음력에 익숙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생일을 자축했지만,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양력 기준으로 조촐한 생일상을 차려왔다.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던 옛날에는 이순(耳順)을 장수(長壽)의 징표(徵標)로 여겨 환갑잔치를 떠들썩하게 열었으나,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요즘 세상에 그런 모습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육십 번째 생일날, 아내와 딸과 함께 셋이서 화교(華僑)가 운영하는 동네 중국집에서 오붓하게 자축(自祝)의 자리를 가졌다. 규모는 작지만 소문난 맛집인데, 팔보채와 탕수육에 고량주를 곁들여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뜻밖에도 대학 졸업을 앞둔 딸이 봉투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로 번 돈이라는 봉투 속에는 10만 원이 들어있었다. 고맙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해 가슴이 뭉클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와 데면데면한 아들은 이날 저녁 자리에 없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고 회계법인에서 실무연수를 시작한 아들은 평일인 이날 당연히 출근했고, 불참할 수밖에 없는 알리바이가 확실해 서운해할 것도, 말 것도 없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이번 제주 여행은 마침내 내게도 찾아온 환갑이라는 달갑지 않은 나이와 딸의 대학 졸업을 동시에 기념해 이뤄졌다. 적립만 해둔 항공 마일리지를 마음먹고 사용하기로 하고, 제주행 3인 왕복 항공권과 서귀포 KAL호텔 2박 숙박비로 공제하고도 혼자서 국내 어디든 2번 다녀올 마일리지가 남았다. 여행지에서 이용할 교통수단인 렌터카는 집사람이 예약했다. 가장 난해한 관광 코스 선정과 맛집 탐방은 언제나 헌신적인 딸이 도맡았다. 제주 가족여행에도 아들은 빠졌다. 평생 한 번뿐인 대학 졸업식에도 불참하고, 졸업앨범 사진 촬영도 하지 않은 아들이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을까, 싶다.

드디어 3월 1일, 출발일이 밝았다.


가족여행 1일 차 – 2023년 3월 1일(수)

#오래된 기억 속의 김포공항

아침부터 날이 끄무레하고 흐렸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고 오후부터 갠다는 일기예보다. 호출한 택시를 타고 12분 만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마지막으로 탄 게 10년도 더 됐고, 김포공항에 와본 지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이라 설레기도 하고, 약간은 어색하기도 했다. 모바일 발권 서비스를 이용한 덕분에 탑승 시간까지는 꽤 여유가 있었다. 티켓팅 후 공항 데스크에서 발권하느라 시간 품을 팔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세상 참 편리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물성(物性)에 대한 집착이 남달라 디지털 문명의 급속한 진화를 달가워하지 않지만, 이런 기능만큼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대부분의 국제선 운항을 인천국제공항으로 이관한 김포공항의 모습은 오래전 기억 속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항 내 카페에서 Take Out 커피를 사 들고 한참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뒤 탑승수속을 거쳐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랜만에 앉아본 이코노미석의 답답함은 하나도 바뀐 게 없었다.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던 젊은 시절, 이런 좌석에서 어떻게 열 서너 시간씩 옴짝달싹 못 하고 앉아 있을 수 있었는지, 끔찍한 기분이 밀려왔다. 50분쯤 지나자 기내 방송에서 곧 착륙한다는 기장의 정형화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행기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그친 제주, 때 늦은 점심

삼일절 공휴일이라 제주공항은 붐볐다. 렌터카 회사행 셔틀버스 승차장 위치를 확인한 뒤 공항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비가 멈췄다. 예약한 렌터카 회사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렌터카를 인수하고 곧바로 딸이 점찍어둔 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데다 오후 1시가 훌쩍 넘어 시장기가 돌았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목적지에 다다랐는데 아뿔싸, 식당의 불이 꺼져 있었다. 제주에 몇 번 와본 적이 있던 집사람이 다는 아니지만, 제주 지역 음식점은 수요일에 문을 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하는 수 없이 딸이 재빨리 다른 장소를 검색하고 그곳으로 다시 달렸다. 플랜 B로 급히 물색한 식당은 딱딱한 두 글자의 한자 상호에서 풍기듯, 식당 외관이 요즘 시대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풍경이 눈앞에 드러났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잘 정돈된 내부 장식이 인상적인 맛집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꽉 찬 손님들은 우리처럼 거의 외지(外地)에서 온 관광객으로 보였다. 제주의 명물 옥돔구이와 이름이 특이한 한치 • 돼지 두루치기를 주문했다. 입안으로 들어간 음식의 맛은 주문 전 눈을 사로잡은 아우라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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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숙소 뒤 연못과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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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뒤 정원 옆으로 난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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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인 풍취의 야자수. 저 멀리 보이는 흰 건물이 숙소인 서귀포 KAL호텔


#서귀포 KAL호텔 가는 길

든든하게 배도 채웠겠다, 포만감을 뒤로하고 숙소인 서귀포 KAL호텔로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도착지까지의 거리는 약 40km, 소요 시간은 1시간 10분이었다. 생각보다 제주가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 땅은 이전에 두 번 밟은 적이 있었다. 90년대 신문기자 시절, 두 차례 제주를 방문했었다. 모두 취재를 위한 출장이라 취재현장과 숙소만 오갔을 뿐 시가지 구경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제주행이 나에게는 초행(初行) 길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식사를 막 끝낸 공항 근처의 식당에서 서귀포로 가는 길은 시원하게 뚫려있었다. 서울에서는 당연한 정체현상도 없고, 차도 그리 많지 않았다. 모처럼 드라이브의 즐거움에 들떠 있던 순간, 한라산(漢拏山)을 굽이굽이 도는 산악(山岳) 도로가 나타났다. 한라산은 해발 1,947.3m로 제주도 전역을 아우르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수려한 경관과 다양한 화산지형이 발달해 국제적으로 알려진 관광지답게 웅장한 산세(山勢)의 위용이 복잡한 세상에 시달려온 눈의 갈증을 거침없이 해소했다.


산악도로로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냥 오르막길이 아니라 심하게 꾸불꾸불 소용돌이치는 곡선 도로가 계속되는 데다 오를수록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려 운전대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전방(前方)을 주시(注視)하게 됐다. 새벽부터 아침나절까지 내리던 비가 그친 지 얼마지 않아 축축한 대기상태가 지상에서 멀리 떨어진 산악 지형을 비행하면서 일단(一團)의 운무(雲霧) 행렬로 심술을 부린 것이다. 시야(視野)가 점점 좁아지고 그럴수록 목과 눈에 힘을 주게 됐다. 비상등과 안개등, 전조등을 모두 작동시키고 최대한 속도를 늦춰 서행(徐行) 운전했다. 폭우를 뚫고 나아가는 우중(雨中) 운전도 만만찮지만, 안개로 뒤덮인 산중(山中) 운전은 정말이지 식은땀을 나게 한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한참을 달리자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안개가 하나둘 사라지는가 싶더니 앞이 환해졌다. 비 온 뒤 산중 운전은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

체크인 시간인 오후 3시 조금 넘어 목적지인 숙소에 도착했다. 서귀포 KAL호텔은 해안가에 자리했고, 저 멀리 한라산이 보였다. 제주 전역을 지배하는 한라산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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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폭포로 가는 길은 바다 옆으로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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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정방폭포 인근 바닷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고즈넉한 풍경이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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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폭포 아래 큰 돌과 자갈이 사이좋게 섞여 있다.


#제주 관광 첫 일정, 정방폭포 탐방

2박 3일간 머물 객실은 한라산 뷰 트윈룸으로 정했다. 2인용 침대와 1인용 침대가 각각 1개씩 있고, 특이하게도 발코니를 갖추고 있었다. 객실은 아담하면서 깔끔했다. 아쉬움이라면, 3인용 객실인데 가족이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탁자와 의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30분가량 휴식을 취한 뒤 숙소에서 나왔다. 신중하면서도 순발력 있는 두뇌 회전의 소유자인 딸이 숙고(熟考) 끝에 완성한 제주 투어의 첫 번째 코스, 정방폭포(正房瀑布)로 가기 위해서였다.


서귀포 동쪽 해안에 있는 정방폭포까지는 1.9km, 걸어서 28~29분 거리다. 높이 23m, 폭 8m, 깊이 5m의 동양에서 하나뿐인 해안 폭포로 폭포수가 바다로 떨어지는 광경이 일품이다. 중국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사신(使臣)을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정방폭포로 가는 길은 숙소 앞 해변을 따라 자연 친화적으로 형성된 올레길을 지나는 코스였다.


서귀포 KAL호텔은 빼어난 정원(庭園)으로 소문난 곳인데, 직접 눈으로 본모습은 과연 장관(壯觀)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잔디밭에 놀라고, 이국적인 야자수와 고풍스러운 정자(亭子)와 연못 등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주변 풍광에 또 한 번 놀랐다. 소정방폭포를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니 구(舊) 파라다이스 호텔 서귀포가 우리를 맞았다. 파라다이스 호텔은 현재 운영이 중단된 상태며 건물 한 곳에서 허니문하우스라는 달콤한 상호를 내건 카페만 영업 중이다. 카페 주변으로 난 산책로가 유명하고 야외 테라스에 앉아 저 앞바다에 홀연히 떠 있는 섶섬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어 최고의 포토존으로 꼽히고 있다. 집사람과 딸, 나도 함께 부지런히 스마트폰 카메라 버튼을 눌러 명성(名聲)이 헛말이 아님을 증명하는 경치를 배경으로 이곳에 왔다는 흔적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겼다.


발길을 재촉해 5분쯤 걸어가 도로 위로 올라가니, 귀에 익은 이름이 외벽에 뚜렷한 예쁜 건물이 나타났다. 왈종미술관. 조선백자에서 설계 모티브를 땄다는 3층 건물은 제주에서 생활하며 제주의 풍요로운 미(美)를 싱그러운 그림으로 담아내 온 한국화가 이왈종(1945~)이 세운 미술관이다. 시간에 쫓겨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고,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깜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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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m 높이 절벽 위에서 바다로 쏟아지는 폭포수


도로 아래로 내려가 조금 더 들어가니 정방폭포 입장권 매표소가 등장했다. 표를 사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제법 사람들로 붐볐다. 오르고 내리고 하던 중 폭포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저 앞 30m쯤에 정방폭포가 우렁차게 폭포수를 토해내고 있었다. 23m 절벽 위에서 바다로 맹렬히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에 다가가자 물방울이 얼굴과 옷 여기저기로 달려들었다.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보기 드문 해안폭포의 모습이 더욱 늠름하게 느껴졌다. 우리처럼 가족여행을 온 사람들과 다정하게 커플 사진을 찍는 연인들, 친구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들 모두 흥겹고 행복한 표정이 보기 좋았다. 정방폭포를 배경 삼아 꽤 많은 사진을 디지털 앨범에 저장한 뒤 숙소로 되돌아갔다.


#이중섭미술관 거리 탐방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옮기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호텔 주변 풍경은 정방폭포로 갈 때보다 더욱 눈을 간지럽혔다. 삼다도(三多島)라는 별칭답게 서귀포 바닷바람의 기세는 만만찮았다. 이른 봄을 알리는 기지개를 켠 3월 초의 바다 날씨는 매서웠지만 대도시의 오염된 공기에 속절없이 시달린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시름을 잠시나마 추스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놓치기 싫은 풍광(風光)을 홀로 사진에 담느라 뒤처진 내 눈에 비친 먼발치의 모녀의 뒷모습은 새삼 가족의 정(情)을 떠올리게 했다. 아들아, 너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속으로 침을 삼켰다.

숙소에서 바닷가 쪽으로 길게 이어진 드넓은 정원과 진귀한 식물, 아름드리나무를 가꾸느라 정성을 다한 호텔 식구들의 노고(勞苦)에 경의(敬意)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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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가는 길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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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가는 길목에 흐드러지게 핀 홍매화


호텔 주차장에 세워둔 렌터카를 타고 이중섭미술관 거리로 출발했다. 숙소에서 3km 떨어진 이중섭미술관 거리에는 금방 도착했다. 미술관 폐관(閉館) 시간이 임박해 미술관 관람과 이중섭 생가 방문은 내일로 미뤘다. 이중섭이 한국전쟁 기간에 잠시 살았던 생가는 초가지붕을 한 제주 전통 가옥이다. 길거리에서 보이는 대로 생가 외관과 마당을 잽싸게 스마트폰에 담았다. 생가 옆에 이중섭미술관이 있다. 미술관으로 가는 길목과 길목 사이의 고샅이 정겨웠다.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고샅은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물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문득 어릴 때 살던 고향 동네 곳곳에 뚫려있던 먼지 나는 고샅 맨땅에서 친구들과 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공놀이, 구슬치기, 딱지치기, 말타기, 술래잡기 놀이를 했던 때가 반백 년 전이다. 세월이 유수(流水)라지만 쏜살같은 시간의 흐름이 무심했다. 그때의 골목길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회상하며 뒤처진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래서 여행은 시간을 거슬러 까마득히 잊고 있던 추억을 되살리는 고맙고 소중한 길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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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전통 가옥 형태를 한 이중섭 생가의 초가지붕. 1997년에 복원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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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미술관 가는 길 사이에 난 고샅(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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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미술관 거리에 있는 서귀포 관광극장


작가(이중섭 화가)의 산책길로 불리는 이중섭미술관 거리에는 제주 문화를 담은 기획상품을 파는 아트숍이 군데군데 있었다. 기념품과 학용품, 생활용품 등 종류가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많았지만,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매력적인 아이템은 보이지 않아 아이쇼핑만 하고 나왔다.

언덕길에 조성된 이중섭미술관 거리에는 2015년 4월 25일 재개관한 서귀포극장도 보였다. 서귀포극장은 1963년 10월에 개관한 (구) 서귀포 관광극장이 모태(母胎)로 당시 웅변대회와 대중가수, 악극단 공연 등이 펼쳐진 문화마당으로 인기를 끈 장소였다는 안내문이 눈길을 끌었다. 뱃속에서 시장기가 돌았다. 시곗바늘이 오후 6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제주 흑돼지구이

첫날 저녁 메뉴는 제주 흑돼지구이. 제주 흑돼지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550호로 지정된 제주 전통음식으로 제주축산진흥원에서 사육하고 있다. 제주도 기후와 풍토에서 자라 질병 저항력이 뛰어나고 체질이 튼튼해 일반 돼지보다 30~40% 정도 가격이 비싸다. 1970년대까지 제주도 돼지는 돼지를 사육하는 가정의 화장실을 뜻하는 돗통시에서 똥을 먹고 자라 똥 돼지라 불렸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제주 전통음식 선호도 조사에서 1위에 올랐을 정도로 제주 흑돼지는 전국구급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은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선정 메뉴가 흑돼지인 데다 옛날 궁궐에서 왕에게 올리는 식사를 짓는 부엌을 일컫는 수라간(水刺間)을 상호(商號)에 차용(借用)해 잔뜩 기대했지만, 맛은 그저 평범한 수준이었다. 역시 음식은 직접 먹어보기 전까지는 믿을 게 못 된다는 만고(萬古)의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쨌거나 흑돼지구이와 제주산 한라산 소주를 반주로 곁들인 제주에서의 첫날 일정 마무리를 느긋하게 하고 길 건너 편의점에서 생수와 음료, 숙소에서 입가심 삼아 마실 캔맥주를 사서 호텔로 향했다.

객실 발코니에서 들이마신 서귀포 바닷가 밤공기가 차고 무거웠다. 요즘 술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다는 딸과 술을 못 마시는 집사람을 두고 혼자 캔맥주 2개를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딸의 평소 주량은 소주 2병이다. 어쩔 수 없이 가끔 감당하는 혼술을 나는 짝사랑으로 여긴다. 짝사랑이 낭만적일 수는 있어도 아름다울 수는 없다. 술은 역시 같이 마셔야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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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판에서 익어가고 있는 두툼한 흑돼지 살


제주(濟州) 가족(家族) 여행기(旅行記) <中>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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