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향 집 오디세이 ③안방
고향 집 오디세이 ③안방
#안방과 아버지
고향 집 안방,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버지다. 그것은 집에 계실 때면 언제나 양반다리를 하고서 안방을 지키고 있던 아버지의 근엄한 모습 때문일 것이다. 집안의 가장(家長)이자 어머니의 동반자이면서 세 아들을 건사한 아버지는 내가 철들면서부터 쉽게 다가가기 힘든 엄한 존재였다. 정이 많은 성품을 타고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늘 자상하게 대했지만,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릴 때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대쪽 같았다.
#밥상머리 교육
내 또래의 아버지들이 으레 그랬듯, 아버지도 매사 자식들의 사소한 일탈(逸脫)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가령, 어른이 왔는데 앉아서 인사를 한다거나, 밥상머리에서 반찬 투정을 하고, 밥을 깨작깨작 먹을라치면 즉각 꾸짖는 일을 잊지 않았다. 문지방을 밟고 지나가면 복(福) 떨어진다는 말씀이 떨어졌고, 누워 있는 사람의 머리맡을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타이르곤 했다. 어쩌다 별생각 없이 한두 숟가락 밥을 남길 때도 복 나간다고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라는 충고에 속으로는 툴툴대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유일한 항변 수단, 묵비권
따지고 보면 복 떨어진다, 복 나간다는 말은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속신(俗信)에 불과해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거나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엄격한 가부장 교육이 몸에 밴 우리 형제로서는 감히 아버지의 말씀에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말씀에 유일하게 항변할 수 있는 수단은 고개를 숙인 채 고작 묵비권을 행사하는 정도였다.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지, 즉 나의 할아버지 앞에서 수없이 겪었을 그런 경험에 비추어 자식들의 묵비권 제스처가 어떤 의미인지는 익히 알고 계셨을 것이다.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아버지도 이만하면 됐다, 하는 뜻을 넌지시 내비치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막걸리와 양은 주전자. ⓒJon Åslund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아버지는 또 늦잠을 자거나 이불을 개지 않는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카랑카랑한 몇 차례의 고함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따금 딴청을 피우며 꾀를 부리다가도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얼른 이불을 펼쳐 가로로 한번, 세로로 한 번을 접어 장롱 속에 집어넣곤 했다.
#조간신문과 아버지
새벽 일찍 일어난 아버지가 가장 먼저 찾는 것은 조간(朝刊) 신문이었다. 대문 앞에 배달원이 떨어뜨려 놓고 간 신문을 집어 든 아버지는 안방에서 1면부터 맨 뒤 사설(社說)까지 그날의 주요 기사를 꼼꼼하게 정독했다. 기사를 읽을 때, 아버지는 습관처럼 담배를 빼 물었다. 기사 내용이 뭔가 심상찮으면 줄담배를 태우기도 했다. 70년대 당시 신문 기사는 한자투성이었다. 제목은 물론 기사 본문과 사진 설명에도 한자가 빼곡했다. 한자를 모르면 신문을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구시대의 유물인 세로 쓰기 시대였고, 지면(紙面) 수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게 적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신문을 조금씩 읽어나갔다. 한글이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과학적인 언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우리말의 70%가 한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한자를 모르면 우리말을 읽고 쓰고 이해하는 문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고 효과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라도 한자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세간에 화제가 된 ‘심심한 사과’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심심(深甚)을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황당한 일도 한자를 모르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도 한자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됐을 때, 더욱 두터워지리라 믿는다.
#자리끼의 존재 의미
안방을 떠올리게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물건은 자리끼다. 자리끼는 밤에 자다가 목이 말라 깼을 때 마시기 위해 머리맡에 준비해 둔 물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안방 아버지의 머리맡에는 늘 자리끼를 담은 양은(洋銀) 물 주전자(酒煎子)와 물 잔이 놓여 있었다. 희한하게도 아버지는 세상모르게 주무시다가도 한밤중 또는 이른 새벽에 꼭 한 번은 눈을 떠 자리끼를 찾곤 했다. 친구분들과 흥에 겨워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온 날이면 자리끼를 찾는 횟수도 잦았다. 그런 날 술이 덜 깨, 물 주전자를 입에 대고 자리끼를 벌컥벌컥 들이켤 때 나는 소리는 내 귀에도 다 들렸다.
#양은 주전자와 술 심부름
우리 집에는 자리끼 용 물 주전자 외에 또 하나의 양은 주전자가 있었다. 술 도매상인 동네 술도가(都家)에서 막걸리를 받아올 때 쓰는 거였는데, 나도 술 심부름을 심심찮게 했다. 어떤 날은 주전자에 막걸리가 넘치게 찰랑찰랑 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술맛이 궁금한 호기심이 일어 몇 모금 마시기도 했다. 시큼 텁텁한 막걸리 맛을 알 턱이 없던 때라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당시에는 미성년자에게도 술과 담배를 팔았던 어리숙한 시대였다.
주전자의 한자 표기가 궁금해 사전을 찾아보니 술 주, 자와 전(부침개) 전, 자가 들어간 酒煎子로 확인됐는데, 막걸리를 받아올 때 쓰이는 이유로 충분하겠다, 싶어 웃음이 났다. 비 오는 날 막걸리 안주로 부추전과 빈대떡 따위의 부침개가 어울리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대학 다닐 때 학교 주변 선술집에서도 막걸리는 양은 주전자에 담아져 나왔다.
재떨이. ⓒPARK IN KWON
#스테인리스 재떨이
자리끼 용 물 주전자 외에 사시사철 안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물건이 또 있었는데, 스테인리스 재떨이였다. 그때는 실내, 외 어디에서나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흡연의 유해성과 간접흡연에 대한 경각심이 전무(全無)할 때라 흡연자들의 천국인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골초는 아니었지만 애연가였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루에 대략 반 갑(匣), 10개 피 가량을 태우셨던 것 같다.
담배 심부름도 많이 했다. 50년 가까이 된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여러 차례 심부름을 한 탓에, 지금도 아버지가 태운 담배 브랜드를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즐겨 피운 담배 이름은 태양이었다. 기록을 살펴보니, 태양은 1974년에 처음 출시돼 1989년까지 판매된 것으로 나와 있다. 아버지는 쉰을 갓 넘긴 1980년대 초, 30년 넘게 피우던 담배를 단 한 번에 끊었다.
중고등학교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담배를 사러 자주 동네 가게에 들렀었다. 어느 날 집에 혼자 있을 때였는데, 혹시나 하고 안방 붙박이장 문을 열어 보았는데, 짐작대로 서너 개 피가 빈 태양 담배 한 갑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 호기심이 발동해서 한 개 피를 슬쩍 빼내 입담배 시늉을 했는데 기침만 나오고 무슨 맛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 또래들이 으레 그랬듯, 나는 대학 입학 오리엔테이션 때 재수생 동기들한테 담배를 처음 배웠다.
#개비 담배와 선물용 보루 담배
내 기억을 국산 담배 출시 공식 기록과 대조해 보니, 대학 때 주로 피운 담배는 청자와 은하수, 한산도, 거북선, 솔 등이었다.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돈이 궁한 애연가들을 위해 길거리 가판대에서 개비 담배도 팔았다. 아마 3개비에 100원인가, 했던 것 같다. 이 시기는 고속버스와 기차, 심지어 비행기 안에도 흡연석이 있었다. 1990년 1월 말, 대만으로 첫 해외 출장을 갈 때 비행기 맨 뒷자리에 마련된 흡연 공간에서 맛있게 담배를 피웠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선물용으로 10갑을 묶어 포장한 보루 담배가 인기였다.
#안방 살림살이
안방은 대청마루와 함께 우리 가족의 식사 공간이기도 했다. 여름과 초가을엔 대청마루, 봄과 늦가을, 겨울철에는 안방에 둘러앉아 아침과 점심, 저녁을 먹었다. 안방 살림살이로는 금성사 제품인 흑백 TV와 신일 선풍기, 전기밥솥, 어머니가 몸단장할 때 사용한 앉은뱅이 화장대, 다리미, 전화기, 장롱, 수납장, 재봉틀 등이 있었다.
#안방과 부엌의 소통망
안방은 부엌과 맞대어 설계됐는데, 양쪽으로 통하는 작은 미닫이문이 하나 있었다. 어른 몸통이 겨우 들어갈락 말락 한 이 문은 부엌에서 안방으로 음식을 실어 나르고 설거짓거리를 내놓는 용도로 사용됐다. 안방에서 부엌, 부엌에서 안방으로의 즉각적인 소통망이자 물건을 신속하게 옮길 수 있는 유통경로라 흥미로우면서도 실용적이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시다가 수시로 이 문을 열고 안방에 있는 우리에게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키셨다.
#장롱과 비밀공간
장롱 속 아래쪽에 딸린 3단짜리 수납함에는 어머니가 혼례 때 입었던 비단 치마저고리와 아버지의 바지저고리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인 할머니한테서 선물로 받은 백금 가락지와 루비, 비취, 사파이어 반지, 진주 목걸이, 시계가 담긴 보석함도 장롱 속 수납함에 보관했다.
안방에는 어머니가 현금다발을 감춰둔 비밀공간도 하나 있었다. 장롱 위 맨 왼쪽 끝자락 살짝 홈이 패인 곳에 1만 원권 지폐뭉치를 보관했는데, 현금만 사용하던 시대라 혹시나 들이닥칠지도 모를 양상군자(梁上君子)로부터의 피해를 방지할 나름의 궁리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주택가에 심심찮게 도둑들이 나타나던 시절이었다.
고백건대 고등학교 때 이 공간을 알아챈 나는 어느 날 어머니 몰래 1만 원권 한 장을 슬쩍 빼내 용돈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지폐뭉치가 제법 두툼해 설마 한 장 빠진 것을 눈치채실 리야 없겠지, 하고 안심하기 무섭게 다음 날 그 사실을 안 어머니의 추궁에 사실대로 털어놓고 백배사죄했다. 어머니는 지폐 액수를 꼼꼼하게 따로 적어두는 방식으로 현금출납의 이상 유무를 통제하고 있었다. 어머니 혼자만 알고 넘어가 집안 식구들은 몰랐다. 철이 없던 때였다.
#벽장과 다락방
당시 기와집에는 요즘 시대에는 볼 수 없는 진귀한 구조물이 있었는데, 벽장(壁欌)과 다락방이 대표적이다. 벽장은 한자 그대로 벽 속에 있는 또 다른 장롱이다. 방바닥에서 위로 대략 30cm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벽을 뚫어 미닫이문을 내고 그 안에 물건을 집어넣고 보관할 수 있는 일종의 다용도 공간이다.
반짇고리. ⓒPARK IN KWON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물건, 가령 다리미나 바늘, 실, 골무, 가위, 헝겊, 단추 따위의 바느질 도구를 보관하는 작은 대나무 함인 반짇고리, 뜨개질바늘과 뜨개질실이 담긴 바구니, 다듬잇방망이와 다듬잇돌, 망치나 드라이버, 스패너와 같은 공구(工具) 세트, 재봉틀에 치는 기름통, 심지어 심심풀이 간식용 뻥튀기와 후식으로 즐겨 먹었던 귤 등이 그 안에 있었다. 앉아서도 벽장문을 열어 손쉽게 물건을 꺼내고 넣을 수 있어 접근성과 편의성이 뛰어난 공간이었다.
벽장 옆에는 또 하나의 미닫이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면 다락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미닫이문을 열고 올라서면 코앞에 허리춤보다 약간 낮은 벽이 보이는데, 그 벽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 공간이 제법 널찍해 당장 필요하지는 않지만, 아끼거나 소장 가치가 있는 물건, 버리기에 아까운 잡동사니들을 쌓아두기에는 그만이었다.
다락방에는 초중고 시절 나의 손때가 묻은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뿐 아니라, 줄을 감아 돌리는 10여 개의 팽이와 수백 개의 구슬, 지름 3cm 크기의 동그란 딱지 수천 장, 동전처럼 생긴 쇠붙이를 헝겊으로 감싸 발로 차고 놀 때 쓰는 제기 등이 여러 개의 종이 상자에 포장된 채 오랫동안 놓여 있었다.
내가 애지중지했던 이 물건들은 안타깝게도 20여 년 전 양옥(洋屋)으로 이사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대학 진학 때부터 서울 생활을 하던 내가 없는 사이, 낡고 오래된 물건들을 한꺼번에 정리하는 바람에 다락방의 추억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