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향 집 오디세이 ④부엌살림
고향 집 오디세이 ④부엌살림
#부뚜막 위의 쪽문
고향 집 부엌은 안방과 붙어 있었다. 부엌은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하는 주방(廚房)의 옛날식 이름인데, 내가 살던 지역에서는 정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지는 부엌의 경상도 방언이다. 반세기 전인 60~70년대 도시 서민 가구의 난방(暖房) 방식은 온돌(溫突)이었고, 연료는 연탄이었다.
부엌이 안방과 맞대고 있는 위치적 특성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하는 장소가 안방이라는 점과 관련이 깊다. 요리하는 공간과 밥 먹는 공간 사이의 거리를 좁혀 부엌과 안방의 기능적 효율을 높이고자 한 선조들의 실용적인 사고에서 비롯됐다.
우리 집 부엌은 부뚜막 바로 위로 어린아이 몸이 들어갈 크기의 작은 쪽문이 나 있었는데, 미닫이식 쪽문을 열면 안방 아랫목과 바로 연결됐다. 쪽문은 부엌에서 안방으로 밥과 국, 반찬을 실어 나르는 최단 거리 통로였다. 식사 때가 되면 어머니는 수시로 쪽문을 열고 우리 형제 이름을 부르며 안방 밥상 위에 음식을 차리라고 채근하셨다.
남산 한옥 마을 부엌 아궁이. ⓒhangidan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부뚜막과 부엌문
쪽문 아래에는 아궁이와 부뚜막이 있었다. 전통적인 부뚜막은 솥을 걸기 위해 아궁이 위에 흙과 돌을 버무려 넓고 평평하게 만든 턱인데, 우리 집 부뚜막은 돌을 쌓고 그 위에 시멘트를 바른 것이었다. 부뚜막은 지금의 싱크대 옆 식기 건조대나 수저통, 주방 보조기구 등이 놓인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기와집 부엌의 구조상 부뚜막은 육체 노동관점에서 사용자 친화적이지 않았다. 입식(立式)으로 설계된 요즘의 주방과 달리 부뚜막에서는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히거나 쪼그리고 앉은 채 요리를 하고 식기(食器) 정리를 할 수밖에 없어 안 그래도 가사(家事) 노동에 지친 어머니들의 육체적 부담을 가중(加重)시키는 고약한 존재였다.
부엌문은 창이 달린 목제(木製) 미닫이식이었는데, 마당과 부엌 사이에는 시멘트 위에 타일로 마감한 두께 15cm가량의 얕은 턱이 1m가 넘는 폭으로 오른쪽의 안방, 왼쪽의 작은 방 입구까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부엌문은 이 턱에서 위로 20cm쯤 떨어진 지점에 설치돼 있어 부엌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장애물을 타 넘듯이 차례대로 발을 들고 딛도록 설계됐다.
부엌문과 턱 사이에 일정 거리를 둔 것은 마당에 쌓인 바닥 먼지가 바람에 쓸려 부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나름의 방어막이었다. 밥 짓고 음식 만드는 부엌 출입문이 마당이라는 외부 환경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궁여지책이 아니었나, 싶다.
#아궁이와 찬장
부엌 아궁이는 두 개였다. 하나는 안방 난방용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을 장만하는 취사(炊事)용이었다. 식사를 준비할 때 어머니는 아궁이 두 개로는 모자라 석유풍로(風爐)에도 늘 성냥불을 붙여 사용했다. 네 식구가 먹을 밥 안치고 국 끓이고 감자 볶고 달걀 부치고 생선 굽고 하는 일에는 모두 화력(火力)이 필요했다.
난방용 아궁이가 24시간 가동되는 한겨울에는 화력 지원 도구가 총동원됐지만, 난방이 불필요한 여름이면 아궁이 하나와 석유풍로 만으로 모든 음식을 해결하느라 어머니의 몸과 마음이 늘 바빴다. 그럴 때면 식사 준비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는데, 부엌에 머무는 어머니의 시간도 그만큼 늘어났다.
재래식 부엌이라 냉방시설이 있을 리 만무한 한여름에 더위와 씨름하랴, 쫓기듯 숨 가쁘게 음식 만들랴,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린 어머니의 여름은 그야말로 수난의 계절이었다.
우리 집 부엌에는 작은 찬장(饌欌)이 여러 개 있었다. 찬장은 밥그릇과 국그릇, 종지, 작은 접시, 큰 접시, 양푼, 소쿠리, 식재료, 양념통, 밥주걱, 국자, 가위, 식칼, 과도(果刀), 채칼, 감자 칼, 도마, 냄비 받침대, 도시락, 수저통 등 부엌 용품을 보관하는 목제 수납장이다.
우리 집에는 3단 또는 4단 칸막이 구조의 소규모 찬장이 네댓 개는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찬장은 부뚜막 반대편 벽에 줄지어 서 있었고, 식사 때가 임박하면 어머니의 손길과 발길은 아궁이와 찬장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찬장에는 식기와 주방 도구들만 들어있었던 게 아니다. 냉장고를 장만하기 전까지, 우리 집 찬장은 먹다 남은 국이나 찌개, 밑반찬 등 온갖 음식들의 저장고로도 사용됐다. 어머니가 찬장 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집안 살림살이 중에서도 찬장은 단연코 어머니의 손때가 가장 많이, 가장 오래 묻은 물건이 아닐 수 없다.
행주와 마른 수건은 찬장 옆 나무로 만든 선반에 늘 올려져 있었고, 부엌에서만 사용하는 빗자루와 쓰레받기, 음식물 찌꺼기 통, 쓰레기통은 부엌 안쪽으로 따로 난 미닫이문 뒤 작은 창고에 놓여 있었다.
#쌀 이기와 쌀 조리개
날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삼시 세끼를 위해 어머니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쌀을 이는 것이었다. 60~70년대 곡식을 찧어 껍질을 벗겨내는 도정(搗精) 기술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열악했다. 쌀밥을 씹을 때 걸핏하면 이물질(異物質)이 ‘딱’, 소리를 내며 치아를 강타하는데, 이물질은 자그마한 돌이었다.
추수한 벼를 탈곡(脫穀)할 때 딸려 온 돌 부스러기가 쌀을 이는 과정에서 걸러지지 못하고 밥상에 그대로 올려져 벌어진 일이다. 돌뿐 아니라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채 쌀 속에 섞여 있는 벼 알갱이인 뉘도 심심찮게 입안을 침범했다.
그때 쌀을 밥솥에 안치기 전 돌과 뉘를 걸러내는 일은 어머니들의 일상이었다. 우리 집 부엌에도 쌀을 이는 도구인 조리(笊籬)가 두 개 있었다. 조리는 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대오리나 싸리로 엮은 삼태기 모양의 도구인데,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어머니는 물에 잠긴 채반에 받친 쌀을 수북이 얹은 조리를 물속에서 물 위로, 물 위에서 다시 물속으로 원을 그리는 방식으로 흔들고 돌리면서 이물질을 제거해 냈다. 아주 작은 돌 부스러기와 뉘는 어머니의 손목 움직임에 따라 조리 구멍 밑으로 빠져나가기도 했지만, 쌀들의 틈바구니에 빌붙어 밥상에 오르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이물질을 눈으로 찾아내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더 많았다.
어머니의 정성 어린 조리질에도 운 좋게 살아남은 돌 부스러기나 뉘도 물론 있었다. 밥을 먹을 때, 혀끝으로 이물질을 수색(搜索)하는 일도 만만찮았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는 쌀을 이기 전, 대략 20분 정도 쌀을 물에 불려 놓았다. 이렇게 하면 웬만한 뉘는 물 위로 떠 쌀 이기의 부담을 덜 수도 있고, 막 지은 밥알의 식감이 향상되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우리나라 전통 무쇠 밥솥. 어릴 때 고향 집에도 이런 솥이 있었다.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무쇠 밥솥과 밥 짓기
전기밥솥이 일반화되기 전, 밥 짓는 일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네 식구가 먹기 충분한 양의 쌀을 인 다음, 솥에 안치야 되는데 이때 물의 양을 가름하는 게 관건(關鍵)이었다. 물이 넘치면 밥이 질고, 물이 모자라면 밥이 꼬들꼬들해지는데, 어머니는 물에 잠긴 쌀 위에 오른손을 곧게 펼쳐 얹어 손등이 물에 잠길락 말락, 하는 정도를 기준선으로 잡았다.
요즘 대세(大勢)인 압력밥솥 안을 보면 인분 수(人分 數)에 해당하는 적정한 물의 양을 표시한 눈금이 보이는데, 이 눈금이 손등 윗부분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손등을 이용한 눈대중으로 물의 양을 짐작한 옛날 어머니들의 방식이 삶의 지혜에서 비롯된 과학적이고 정확한 결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 밥솥은 무쇠로 만든 무쇠 밥솥이었다. 겉보기에도 튼튼하게 생긴 무쇠 밥솥은 내구성이 뛰어나고 밥맛이 좋아 당시 주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무쇠 밥솥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전기밥솥을 장만할 때까지 우리 식구들의 끼니를 책임진 믿음직하고 고마운 존재였다.
무쇠 밥솥에서 끓는 소리가 나면 어머니는 활짝 열어 놓은 아궁이 구멍을 5분의 4쯤 막아 센 불을 약한 불로 낮췄다. 솥에 담긴 쌀 양에 따라 차이가 났지만, 평균적으로 4~5인분의 밥을 지은 어머니는 약한 불 상태에서 15분 정도 기다렸다가 솥뚜껑 한쪽 끝을 살짝 걸치듯 들어 올려 5분간 뜸을 들였다. 뜸을 들이지 않거나 뜸을 잘못 들이면 설익은 밥이 되기에 뜸 들이는 일은 물의 양 조절과 함께 어머니가 가장 신경 쓴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