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향 집 오디세이 ⑥설거지와 손빨래
고향 집 오디세이 ⑥설거지와 손빨래
#식기세척기
두세 달 전쯤, 식기세척기를 들여놓았다. 몇 년 전에도 식기세척기를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싱크대 주변 공간의 효율적인 사용에 걸림돌이 돼 집사람이 내다 버렸다. 사고 보니 공간 친화적 제품이 아니어서 사용하기도 불편했고, 식기(食器)와 주방 도구를 정리, 정돈하기에도 소모적인 품을 팔아야 했던 이유가 컸다.
새로 구매한 식기세척기는 싱크대 바로 옆 수납장 아래 공간에 꼭 맞게 설치했는데, 앞에서 문을 여는 제품이라 공간 친화성이 뛰어난 게 큰 장점이다. 지난번 제품은 위에서 문을 여는 방식이라 식기세척기 위 공간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었고, 문을 열면 상부 수납장 바닥에 끝부분이 부딪혀 조심스레 다뤄야 했다.
우리 집 식기세척기는 가정에서 쓰는 6인용인데, 지난번 제품보다 세척 기능이 우수하고 세척 시간도 빨라 설거지라는 힘든 가사(家事) 노동에서 벗어나게 해 준 고마운 존재다. 큰 냄비나 프라이팬 등 덩치가 큰 주방 도구만 손 설거지로 해결하고 그릇이나 접시, 수저, 국자, 식칼, 과도(果刀), 부침개 뒤집개 등은 모두 식기세척기의 힘을 빌린다.
공간 친화성이 뛰어난 우리 집 식기세척기.
우리 집에서는 건조는 생략하고 세척 기능만 사용하는데, 세척이 끝나면 자동으로 문이 열려 자연 건조로 그릇을 말린다. 건조 기능을 건너뛰는 이유는 전기세도 절감하고 설거지 시간도 단축하기 위해서다.
집사람 말로는 우리 집 가전제품 중 만족도가 가장 높은 게 둘 있는데, 하나는 식기세척기고 다른 하나는 건조기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로, 빨래는 세탁기로, 세탁한 빨래 건조는 건조기로 할 수 있는 참 편리한 세상이다.
#설거지의 고단함
식기세척기와 세탁기, 건조기가 없던 시절에 설거지와 빨래, 빨래 말리기는 어머니들이 종일(終日) 되풀이해야 했던 고단한 일상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중반, 어머니의 일상은 도돌이표였다.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처럼 날마다 삼시세끼 밥하고 반찬 만들고 밥상 차리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빨래를 널었다.
요즘에야 가사 분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자연스럽고 보편화된 시대이지만, 그때는 집안의 모든 살림을 어머니 혼자 짊어져야 했다. 그 시절, 이 땅의 어머니들은 일당백(一當百)의 슈퍼우먼이자 불굴(不屈)의 전사(戰士)였다. 가사 노동의 완결판이랄 수 있는 고된 걸레질과 함께 설거지와 빨래는 어머니에게 숙명(宿命)이었다.
세탁기를 들여놓기 전 어머니는 일일이 손으로 빨래했다.
네 식구가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난 설거짓거리는 만만찮았다. 입식(立式) 주방이 아닌, 재래식 부엌에서 감당해야 하는 설거지는 고달픈 육체노동이었다. 어머니는 부엌문 바로 앞에 설치된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설거지했다. 4인 가족 한 끼 설거짓거리를 치우는 데에는 빨라야 1시간에서 평균 1시간 10분 남짓 걸린다.
3년 전부터 주말마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내가 설거지를 끝내는 시간이 그 정도다. 어머니도 한 끼 설거지에 1시간 이상 공을 들였을 것이라, 하루로 치면 최소 3시간은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쑤시는 고통을 참아내는 묵언수행(默言修行)을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설거지보다 힘들었던 손빨래
빨래는 노동량(勞動量)과 노동 강도 측면에서 설거지보다 고된 일이었다. 네 식구의 빨랫감은 설거짓거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겉옷과 속옷, 아버지의 와이셔츠와 넥타이, 잠바, 3형제의 교복(校服)과 체육복, 교련복, 운동화, 슬리퍼, 양말, 수건, 손수건, 행주에다 걸레까지 어머니 혼자 감당해야 할 빨랫감은 산더미처럼 나왔다.
빨래 장소는 마당 한 구석 수돗가였는데, 설거지와 마찬가지로 쪼그리고 앉아 손과 팔, 상체를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중노동(重勞動)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이불 겉에 씌우는 홑겹 껍데기인 이불 홑청과 베개 겉을 덧싸는 베갯잇이 빨랫감으로 나오는 날이면 그야말로 전쟁이 따로 없었다.
이불 홑창과 베갯잇의 세탁 과정은 복잡했다. 먼저 가루로 된 세탁세제를 푼 물에 빨랫감을 담근 뒤 애벌빨래를 하고 다시 삶아야 했다. 찌든 때를 솎아내는 삶는 작업이 끝나면 빨랫방망이로 한참 두들긴 다음에서야 손으로 주물러 세탁했다. 삶는 빨랫감은 또 있었는데, 속옷과 행주, 걸레가 그랬다.
#흥미로웠던 이불 빨래
그때는 이불도 집에서 직접 세탁했는데 힘들면서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3분의 1쯤 물을 부은 고무다라이에 세제를 풀고 이불을 넣은 다음 두 발로 딛고 올라서 번갈아 밟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애벌 이불 빨래라고 할 수 있는 이 작업은 어머니 혼자 할 때도 있었지만, 우리 형제들이 도울 때가 많았다.
물을 잔뜩 먹은 이불을 발로 밟을 때마다 풍선 바람이 빠지는 듯 희한한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가 재미있어 장난 삼아 열심히 밟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가 빨래 부담에서 유일하게,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불 빨래였다.
#한겨울 설거지
기와집에 살 땐 온수(溫水) 시설이 없어 온수도 없었다. 추운 겨울만 되면 불편한 게 여럿 있었는데, 온수의 부재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 부엌 아궁이 두 곳 중 하나에는 늘 커다란 양은솥이 걸려 있었다. 물을 데우기 위해서였다. 수작업(手作業)으로 충당한 온수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생긴 수급불균형은 겨울마다 되풀이되는 골칫거리였다. 세수하고 머리 감는 온수도 아껴 써야 할 판에, 설거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루 세 번 어김없이 다가오는 설거짓거리는 겨울 가사 노동의 체감 고통 수치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얄미운 존재였다. 온수가 모자란다고 아예 찬물만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찬물로는 기름때를 말끔히 제거할 수 없고, 1시간 이상 살을 에는 찬물 속에서 설거지를 끝낸다는 것도 미련한 짓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생각해 낸 방법이 기름때와 그릇에 묻은 양념 제압용 애벌 설거지와 마지막 헹굴 때만 온수를 사용하고, 중간 단계에서는 찬물로 설거지하는 것이었다. 설거지 범위가 넓고 양념 찌꺼기가 많이 남아 손이 많이 가는 냄비나 기름때 범벅인 프라이팬은 예외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온수로 씻어내야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어릴 때 네 식구의 설거짓거리는 날마다 수북이 쌓여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겨울 손빨래
겨울 손빨래는 시간이 지날수록 손이 점점 시리어지는 한계 인내 체감(遞減)의 법칙을 피부로 느끼게 한 고약한 가사 노동이었다. 온수가 부족하기는 설거지 때보다 더했다. 설거짓거리보다 빨랫감이 많아 시간이 더 걸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빨래할 때 뜨거운 물에다 찬물을 섞은 미적지근한 물을 사용했다. 빨래하는 시간은 만만찮았는데, 칼바람이 부는 바깥이라 미지근한 물이 이내 온기(溫氣)를 잃어버려 사실상 찬물이나 매한가지였다.
어머니는 또 설거지 맨 마지막 순서로 그릇을 헹군 따뜻한 물을 버리지 않고 곧바로 운동화와 걸레를 애벌빨래 할 때 사용했다. 날이 추워 금방 식어버리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찬물보다는 낫다며 매번 그렇게 했다. 내가 보기에는 찬물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의 손마디
설거지와 함께 빨래는 한겨울 어머니가 가장 힘들어한 가사 노동이었다. 가족 사랑이라는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평생을 희생한 가사 노동의 흔적은 거칠고 투박한 어머니의 손마디에 화석처럼 남아 있었다. 노년(老年)에 홀로 계실 때, 나는 두 달에 한 번꼴로 고향 집을 찾았다. 갈수록 기력(氣力)이 떨어지는 어머니의 손마디를 물끄러미 쳐다볼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튿날 염습(斂襲)이 끝난 뒤, 다시 못 올 자리에서 나는 어머니의 손마디를 마지막으로 쳐다봤다. 어머니의 손마디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