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은 하늘 흰구름 Apr 17. 2022

시선이 닿는 그 곳에...

'시선으로부터,' 이 책이 내게 남긴 이야기


'시선으로부터,' 이 책은..

20세기 '시선'이란 주인공의 이야기, 그리고 21세기 그녀의 자녀들과 자녀의 자녀들이 '시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보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초반에서는 '그래 사연 없는 인생 없다'  생각을 하였고, 책을 읽어나가면서 '보통인  보통 아닌  사연  인생에 우리가 붙잡고 사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가끔, 아니 꽤 자주, 내가 두어야 하는 시선의 자리를 잃을 때가 있다.

내 방황하는 동공이 자리를 찾지 못하는 그때, 나는 내 기억에 시선을 둔다.

그 시선이 닿는 자리에 내가 살아갈 이유가 있기에...



그리고 강하지 않지만 단단한 문체로 생각할 공간을 마련해준 이 책을 보며,

오래전 적었던 이 글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어렸을 때 아빠와 시장에 간 적이 있다.

매번 엄마와 갔었는데, 그날 엄마가 야근을 하는 날이라 아빠가 족발이 먹고 싶다던 나를 데리고 시장에 갔다.

그리고 족발을 사주시면서 아빠가 아주머니께 했던 그 말과 표정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 딸이 먹고 싶다고 해서…’

그 한마디와 그 장면 속 아빠의 웃음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어느 날 드라마를 보다가 평범한 그 장면이 또 생각이 나 울었던 기억이 있다.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사는 세상’이란 드라마에 나오는 이 내레이션을 들을 때였다.


‘나는 한 때 처음에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어떤 두려운 일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길들여지고 익숙해지고 만만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대로 시간이 가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애인의 배신이 그렇고, 백 번 천 번 봐도 초라한 부모님의 뒷모습이 그렇고,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웃는 준영의 모습이 그렇다.’

_ '그들이 사는 세상' 드라마 중에서



내게도 이렇듯 익숙해지지 않는, 그래서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자극하는 순간들이 있다.


병상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마지막일 줄 몰랐던 만남에 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던 장면이,

할머니가 내 등을 마지막으로 쓰다듬어 주셨던 그 손이 그렇다.

수능 날 아침 학교 앞에서 차마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바라보다 미안하다고 했던 아빠의 눈빛이 그렇다.

유산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용히 잡아주던 남편의 손에 몸이 녹아버리는 듯한 슬픔으로 한참을 웅크리고 울었던 순간이 그렇고...

유산 후 다시 찾아온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을 때 쏟아져 나온 눈물이 그렇다.

퇴사할 때 함께 있던 시간의 소중함을 눈물로 말해준 친구의 모습이 그렇다.

낯선 땅에서 처음 만난 친구가 바리바리 음식을 싸와서 그냥 놓고 가는 뒷모습이 그렇고,

누군가의 마음과 함께 문 앞에 놓인 소중한 꽃이,

감당 못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내 이름만 불러주던 소중한 문자가 그렇다.

 나는 내가 보아도 참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내 스스로가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는 일들이 많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서른 중반 즈음이 된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울음과 무너지는 가슴으로
모두를 적막하게 만들 슬픔과 힘든 순간들은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후에 시간이 약이 될지는 몰라도, 그 순간에는 나가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 그 무거운 공기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는 것뿐…

그리고 그 손을 잡았을 때 받은 위로와 온기로 또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실패해도 좋고, 못해도 좋다.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만든 단단한 마음으로 그리고 또 주저 않으려 하는 그 순간에 함께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면서 나는 또 살아갈 수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닿을 때

내가 그 시선에 머물 때

나는 그 기억으로 살아가는지 모른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해도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_'시선으로부터,' 중 마지막 문단


소설 속 독일에서의 '시선'의 삶은

한편으론 어둡고 너무 무거워 보이지만

책 중 등장한 철쭉과 같이

어둠 속에서 언제든 빛날 준비를 하고 있는

영롱함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닿는 자리에 있는

그녀의 딸, 아들, 손자, 손녀들에게도 그 영롱함이 보일만큼...


** 이 글을 남길 수 있게 해 주신 '시선으로부터,'의 정세랑 작가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유재석이 아니어도 빛나는 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