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이 책이 내게 남긴 이야기
'시선으로부터,' 이 책은..
20세기 '시선'이란 주인공의 이야기, 그리고 21세기 그녀의 자녀들과 자녀의 자녀들이 '시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보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초반에서는 '그래 사연 없는 인생 없다' 이 생각을 하였고, 책을 읽어나가면서 '보통인 듯 보통 아닌 그 사연 있는 인생에 우리가 붙잡고 사는 것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가끔, 아니 꽤 자주, 내가 두어야 하는 시선의 자리를 잃을 때가 있다.
내 방황하는 동공이 자리를 찾지 못하는 그때, 나는 내 기억에 시선을 둔다.
그 시선이 닿는 자리에 내가 살아갈 이유가 있기에...
그리고 강하지 않지만 단단한 문체로 생각할 공간을 마련해준 이 책을 보며,
오래전 적었던 이 글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어렸을 때 아빠와 시장에 간 적이 있다.
매번 엄마와 갔었는데, 그날 엄마가 야근을 하는 날이라 아빠가 족발이 먹고 싶다던 나를 데리고 시장에 갔다.
그리고 족발을 사주시면서 아빠가 아주머니께 했던 그 말과 표정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 딸이 먹고 싶다고 해서…’
그 한마디와 그 장면 속 아빠의 웃음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어느 날 드라마를 보다가 평범한 그 장면이 또 생각이 나 울었던 기억이 있다.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사는 세상’이란 드라마에 나오는 이 내레이션을 들을 때였다.
‘나는 한 때 처음에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어떤 두려운 일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길들여지고 익숙해지고 만만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대로 시간이 가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애인의 배신이 그렇고, 백 번 천 번 봐도 초라한 부모님의 뒷모습이 그렇고,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웃는 준영의 모습이 그렇다.’
_ '그들이 사는 세상' 드라마 중에서
내게도 이렇듯 익숙해지지 않는, 그래서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자극하는 순간들이 있다.
병상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마지막일 줄 몰랐던 만남에 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던 장면이,
할머니가 내 등을 마지막으로 쓰다듬어 주셨던 그 손이 그렇다.
수능 날 아침 학교 앞에서 차마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바라보다 미안하다고 했던 아빠의 눈빛이 그렇다.
유산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용히 잡아주던 남편의 손에 몸이 녹아버리는 듯한 슬픔으로 한참을 웅크리고 울었던 순간이 그렇고...
유산 후 다시 찾아온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을 때 쏟아져 나온 눈물이 그렇다.
퇴사할 때 함께 있던 시간의 소중함을 눈물로 말해준 친구의 모습이 그렇다.
낯선 땅에서 처음 만난 친구가 바리바리 음식을 싸와서 그냥 놓고 가는 뒷모습이 그렇고,
누군가의 마음과 함께 문 앞에 놓인 소중한 꽃이,
감당 못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내 이름만 불러주던 소중한 문자가 그렇다.
나는 내가 보아도 참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내 스스로가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는 일들이 많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서른 중반 즈음이 된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울음과 무너지는 가슴으로
모두를 적막하게 만들 슬픔과 힘든 순간들은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후에 시간이 약이 될지는 몰라도, 그 순간에는 나가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 그 무거운 공기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는 것뿐…
그리고 그 손을 잡았을 때 받은 위로와 온기로 또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실패해도 좋고, 못해도 좋다.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만든 단단한 마음으로 그리고 또 주저 않으려 하는 그 순간에 함께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면서 나는 또 살아갈 수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닿을 때
내가 그 시선에 머물 때
나는 그 기억으로 살아가는지 모른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해도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_'시선으로부터,' 중 마지막 문단
소설 속 독일에서의 '시선'의 삶은
한편으론 어둡고 너무 무거워 보이지만
책 중 등장한 철쭉과 같이
어둠 속에서 언제든 빛날 준비를 하고 있는
영롱함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닿는 자리에 있는
그녀의 딸, 아들, 손자, 손녀들에게도 그 영롱함이 보일만큼...
** 이 글을 남길 수 있게 해 주신 '시선으로부터,'의 정세랑 작가님께 감사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