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의 여정에서 배운 10가지 법칙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통역사로 일하며 수많은 대화에 참여했다. 돌이켜 보니 그간해왔던 일은 '의미의 전달자'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무대 뒤 조력자'의 역할이기도 했다. 그 ‘조용한 연결’의 시간 동안 배운 점을 정리해 봤다.
1. 직함과 이름, 그 안의 세계를 존중하라
사람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고 직함을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와 걸어온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다. 데일 카네기가 <인간관계론>에서 강조했듯이, 상대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관계 형성의 기본이다. 특히 비즈니스 세계에서 직함은 단순한 타이틀이 아니라 그 사람이 쌓아온 경력과 책임을 담고 있다. ‘이사님’이나 ‘박사님’ 같은 호칭은 단지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커리어 여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직함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다면, 낮게 부르는 실수보다는 높이는 쪽의 실수가 낫다. 예를 들어 ‘상무님’과 ‘전무님’ 사이에서 헷갈린다면 ‘전무님’이라고 부르는 편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통역사는 잠시 그 사람의 세상과 연결되어 대화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 세상을 빌리는 데 있어 기본적인 예의는 필수다.
2. 쟁점을 한 줄로 정리하기
통역은 단순한 언어 전달을 넘어서는 ‘맥락의 예술’이다. 어떤 대화에서든 가장 중요한 것은 쟁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속에 숨겨진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통역은 방향을 잃게 된다. 쟁점을 한 줄로 요약해 보는 습관은 핵심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최근에 원전산업동향에 관한 행사를 통역했다. 다양한 참여자와 발표로 논의가 복잡해 보였지만 한 줄로 쟁점을 정리해 보면 의외로 간단했다.
“이 논쟁의 본질은 전 세계 원전 산업이 증가 추세에 있는가, 아니면 축소되고 있는가에 대한 정반대의 시각이다.”
이렇게 논의의 핵심을 명확히 하고 있으면, 대화가 아무리 길어지고 곁가지로 퍼지더라도 그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통역은 바로 그 흐름에 자신을 맡기며 대화의 생동감을 잇는 작업이다.
3. 시간은 가장 큰 아군
시간 엄수는 사회생활, 특히 프리랜서로서의 필수 기술이다. 매번 다른 장소에서 일하는 통역사로서, 소요 시간을 넉넉히 계산하고 일정에 버퍼를 두려고 한다. 초행길이라면 최소 30분 일찍 도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처음 가는 길이 생각보다 복잡할 수도 있고, 교통 상황이 예상치 못하게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택시를 타고 서두르려다가 출근 시간 교통 체증에 갇혀 진땀을 뺀 적이 있다. (역시 출퇴근 시간에는 지하철이 가장 안전하다!) 온라인 세션에서도 준비는 중요하다. 컴퓨터와 헤드폰만 있으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다가 낭패를 볼 뻔한 경험을 하고 얻은 교훈이다. 행사 훨씬 전에 받아둔 줌 링크를 쉽게 찾지 못해 허둥댄 적도 있고, 다른 링크로 잘못 접속해 기다리고 있다가 회의 시작 직전에야 문제를 깨닫고 간신히 정시에 참여했던 적도 있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 행사든 돌발 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결국 준비와 여유 시간 확보가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다. 시간은 항상 준비된 자의 편이다.
4. 평소 언어 습관이 곧 당신의 얼굴이다
유명인들이 말실수로 비난받는 사례를 종종 접한다. 사회적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나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발언, 때로는 상스럽고 저속한 표현까지, 모든 말실수는 결국 평소 언어 습관에서 비롯된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오는 말은 평소의 언어 습관을 반영한다. 보이지 않게 음식을 보자기로 싸본다 한들 그 냄새까지 가리지는 못한다. 아무리 표현을 정제하려 해도, 본래의 말투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품격 있는 언어는 인위적인 표현이 아니라 자연스러우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배어 나온다. 특히 말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언어 습관을 꾸준히 점검해야 한다.
5. 청결은 가장 빠른 첫인상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외모 중심적인 문화다. 얼짱, 몸짱 열풍이나 외모 평가가 일상적인 대화 주제가 되는 모습을 보면 이러한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긴 어렵다. 누군가를 잘 알지 못할 때 '외면'을 보고 상대를 판단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외면’를 이야기할 때, 그것을 ‘생김새’가 아닌 ‘청결’과 ‘태도’로 전환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인상은 몇 초 만에 결정된다고 한다. 첫인상은 외면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의 태도까지 드러나는 순간이다. 청결함과 단정함은 그 태도를 가장 빠르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궁긍적으로 우리는 서로를 평가하기보다 이해하고 연결되기 위해 대화를 시작한다. 첫인상이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며, 그 만남은 단순한 접촉을 넘어, 진정한 소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청결과 태도는 그 문을 여는 열쇠다. (특히 남성분들은 담배냄새나 구취에만 신경을 써도 좋은 인상을 만들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여성은 진화적, 생리적, 사회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남성보다 후각이 훨씬 민감하다.)
6. 준비는 철저하게, 실전은 물 흐르듯이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이라는 말은 통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철저한 준비는 통역사의 기본이다. 관련 자료를 읽고 업계 용어를 숙지하며 예상 질문까지 점검하는 것은 실전을 대비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게 준비해도 어려운 회의가 있고, 의외로 수월하게 진행되는 회의도 있다. 두 경우 모두 '철저한 준비'덕이다. 준비를 안 했다면 어려운 회의는 더 힘들었을 테고, 수월하게 느껴지는 회의는 꼼꼼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때로는 논의가 예상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면서 준비했던 내용들을 살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잘 썰어놓은 음식재료들을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것 같은 아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준비는 어디까지나 준비고, 실전은 실전이다. 실전에 돌입하면, 준비한 내용을 억지로 드러내기보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미리 준비한 내용을 다 버릴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까지 마치면, 예상치 못한 흐름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응할 수 있다.
7.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전문가
누구나 저마다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간다. 일을 하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그들 각각이 가진 특유의 에너지와 관점은 매번 새로운 자극과 배움의 원천이 되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상대방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는 모든 협업과 관계의 기본이다. 전문성은 단순히 직업적 기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마다 살아온 여정 속에서 쌓아온 경험과 고유한 지혜가 그들의 전문성으로 발현된다. 이런 점을 깨닫고 존중할 때 우리는 더 풍요롭고 창의적인 협업을 이룰 수 있다. 타인이라는 '다른 세계'를 접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시야를 넓힐 수 있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단순한 업무를 넘어 삶 전체에 걸쳐 의미 있는 성장의 장이 될 수 있다.
8. 스펀지처럼 배우고 흡수하라
통역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끊임없이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통역사는 매번 새로운 회의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주제와 내용을 접한다. 기술, 의료, 법률, 예술 등 끝없이 변화하고 확장되는 분야의 지식을 얻을 기회가 주어지며,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물론 이런 배움은 비단 통역사의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은 우리에게 배우고 흡수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조차도 열린 마음과 호기심을 유지한다면, 성장의 씨앗은 어디에나 숨어 있다. 일상 대화에서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도 다른 관점을 접할 수도 있다. 가끔은 아이들과의 소소한 대화나 자연 속에서 마주한 순간들이 깊은 통찰을 주기도 한다. 어떤 일을 하든, 스펀지처럼 배우고 흡수하며 다음을 준비하는 자세는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든다. 스펀지는 단순히 물을 빨아들이기만 하지 않는다. 흡수한 물을 적절히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배움도 마찬가지다.
9. 자기 역할에 충실하라
통역사의 본분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하다. 바로 소통을 돕는 것이다. 통역사의 역할은 화려하거나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온전히 연결하는 데 있다. 통역사는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 무대의 조명이나 음향처럼 대화를 지원하는 존재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겸손과 책임감이다. 겸손은 내가 아닌 대화의 흐름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통역사가 대화의 중심에 서려하거나 개인적인 해석을 추가한다면, 본연의 역할을 벗어나게 된다. 책임감은 그 대화를 정확하고 진정성 있게 연결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맡은 역할과 책임이 있다. 그 본질을 이해하고 그에 충실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우리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다.
10. 무엇보다 즐겨라
마지막으로, 어떤 일이든 즐길 줄 아는 자세는 일을 단순한 노동에서 삶의 일부로 바꿔준다.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일하러 가기 전에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는 설렘,
-노트에 펜이 잘 굴러가는 느낌,
-일 중간중간 동시통역 파트너와 나누는 짧은 담소,
-새로운 표현을 정확히 통역해 냈을 때의 뿌듯함,
-회의 후 대화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안도감, -감사 인사를 들었을 때의 작은 보람,
이 모든 순간들 말이다.
통역이라는 일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 새로운 세계를 짓는 창작이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우고, 실전에서 즐기며, 대화를 통해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 이 모든 순간들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삶도 결국은 대화다. 말과 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법을 배워갈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다. 사소한 대화의 순간에도 의외의 통찰이 숨겨져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순간을 붙잡는 법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단순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다.
표지 사진: 사진: Unsplash의 Pavan Trikut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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