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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야 채워지고, 놓아야 흐른다

힘을 빼야 나아가는 삶의 법칙

by 루이보스J

운동이든, 악기든 초보자들이 선생님에게 공통적으로 듣는 말이 있다.


“힘을 빼세요.”


처음 운전대를 잡았던 날, 무섭기만 한 도로 위에서 몸은 경직된 채 운전대를 꽉 붙잡고 있었다. 강사는 말했다.


“힘을 빼세요.”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잠깐 힘을 풀었다가도 금세 긴장이 되었다. 운전 연수의 첫날은 온전히 ‘힘을 빼는 연습’이었다.

피아노를 배우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은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손가락에 힘을 빼자 “


처음 수영을 배우는 게 쉽지 않았던 이유도 물속에서 힘을 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몸을 맡긴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물에 가라앉을 것만 같았고, 그럴수록 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하지만 힘을 빼자 서서히 물 위에 몸이 동동 떠올랐다. 물에 몸을 맡긴 채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갈 때의 그 해방감이 좋아서 여전히 수영을 즐긴다.


#욕심을 내려놓아야 온전히 담긴다.

통역은 긴장의 연속이다. 연사의 말을 듣고, 동시에 정보를 처리하며,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복합적 과정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다. 연사의 말을 들으며 “어떻게 하면 더 우아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연사의 중요한 발언을 놓치고 만다.


힘을 뺀다는 건 단순히 신체적 긴장을 푸는 것 이상의 의미다. 그것은 욕심을 내려놓는 일이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정확한 의미는 물론이고, 연사보다 더 명료한 표현으로 전달되기를 바랐다. 잘하려는 마음이 지나치면, 머릿속에서 길을 잃는다. 연사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된다.


다른 언어로 말을 옮기는 것은 투명한 창처럼 의미가 왜곡 없이 통과하도록 돕는 일이다. 욕심과 긴장을 내려놓고 비워낼 때 비로소 연사의 말은 나에게 온전히 담긴다. 내가 텅 비어 있어야만 그들의 말이 물처럼 흘러들어올 수 있고, 새로운 언어로 변환해 낼 수 있다.


물론 ‘비우기’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현재 실력보다 더 나아 보이고 싶다’는 조바심이 숨어 있다. 부족한 틈을 ‘행운’에 의지하려니 긴장이 높아질 수밖에. 그 틈은 내 통제 밖의‘운’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와 공부로 메꾸는 수밖에 없다. 틈이 메꿔지면 조바심을 내지 않고도 스스로의 능력을 믿을 수 있게 된다.


비움이란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다’가 아니라, 나의 현재 위치나 실력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비움’이 ‘채움’으로 이어진다.


#리듬과 완급의 조화

연사마다 고유한 리듬이 있다. 누군가는 천천히 말하며 생각의 여유를 주고, 누군가는 빠르고 강렬하게 몰아친다. 통역사는 이 리듬을 이해하고 조화롭게 따라가야 한다. 발언자의 어조가 강렬할 때는 나도 그 강도를 반영해야 한다. 반면, 차분한 어조일 때 지나친 에너지를 실으면 메시지가 왜곡된다. 이 강약과 속도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도 힘을 빼야 한다. 긴장한 채 나만의 리듬을 만들어 내려하면 연사의 흐름을 망가뜨릴 수밖에 없다. 힘을 빼고 연사의 리듬에 나를 맡길 때 언어는 자유롭게 흐르고 통역은 살아난다.


결국 ‘힘을 빼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일이든 인간관계든 힘을 주고 움켜쥐려고 할수록 더 어긋나고 만다.


힘을 빼야 흘러간다.


삶은 움켜쥘 수록 미끄러진다.

놓아버리면 자연스럽게흐른다.


"The more you try to grasp life, the more it slips away. Let it go, and it flows."

— Alain de Botton


표진/본문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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