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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이란 어떠한 변호도 필요 없다.

탄핵 정국에 다시 읽는 브레히트

by 루이보스J

#써야 할 글 vs 쓰고 싶은 글

12월 중반, 한동안 잊고 있던 여유가 찾아왔다. 연초까지는 통역 업계의 비수기다. 주요 회의와 행사들이 마무리됐고, 영어권 국가의 대화 상대들은 이미 크리스마스 휴가에 들어갔다. 업무가 한풀 꺾인 시점이지만,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책 출간 논의 중인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야 할 시점이 이미 지났지만, 아직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다. 초가을에 초고를 검토한 출판사에서는 통역이라는 내 업(業)에 대한 이야기를 더 보강해 달라고 제안했다. 책 번역은 몇번 해봤지만, 역자가 아닌 저자로서 쓰는 글은 차원이 달랐다. 요구에 맞춰 글을 쓰는 일이 즐겁지 않은 숙제로 다가왔다. 일단 써두고 나중에 다듬어서 출판사에 보낼 요량으로 브런치에 통역에 관한 글을 꾸역꾸역 올렸지만, 내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쓰고 싶은 글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일도 좋지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내 즐거움의 팔 할은 영화, 책, 라디오다.


고전 영화 유튜브 채널에서 본 <7인의 봉인>

<아라비아의 로렌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라쇼몽>,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같은 영화들, 명상록 해설서, 반야심경 해설서, 논어 해설서 (최근에는 우연찮게 모두 해설서를 읽었다) 등 잠들기 전에 짬짬이 읽은 책 하나하나 글로 풀어낼 이야깃거리가 풍부했다.


"써야 하는 글"과 "쓰고 싶은 글" 사이에서의 갈팡질팡했던 고민은 한순간에 사치가 되었다.


#일상을 앗아갔을 계엄

12월 3일 밤 날벼락처럼 계엄이 선포되었다. 탄핵이 가결되기까지 약 열흘간, 일상이 흐트러졌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평소 듣던 라디오 대신에 뉴스와 정치 팟캐스트를 연속 들으며 초초한 시간을 보냈다.


#브레히트의 <즐거움>

탄핵 가결 후, 마음의 한 고비를 넘긴 날, 매일 밤 듣는 라디오에서 독일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즐거움>이 들려왔다.


오래간만에 듣는 그 이름 브레히트,

내 인생 영화 중에 하나로 손꼽는 <타인의 삶>에서 주인공이 브레히트 시를 읽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에서는 ‘마리아의 추억’을 읽었다)


“아침에 처음으로 창밖 내다보기

다시 찾아낸 오래된 책

감격에 겨운 얼굴들

눈, 계절의 바뀜

신문, 개

변증법

샤워, 헤엄치기

옛 음악

편안한 신발

이해하기

새로운 음악

글쓰기, 어린 식물 심기

여행하기, 노래하기, 친절하기”


-베르톨트 브레히트 <즐거움>


#타인의 삶, 우리의 삶

우리 모두에게는 삶을 지탱해 주는 작고 단순한 즐거움들이 있다. 어쩌면 우리 존재는 작고 단순한 즐거움들의 합일지도 모른다. 그런 즐거움을 빼앗긴다면, 생명이 붙어있다 해도 삶은 이미 소멸한 것과 다름없다.


계엄이라는 무도한 일을 벌인 무리들이 헌법을 잘 몰랐을 리 만무하다. 근본적인 문제는 공감의 결여다. ‘반대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타인의 삶을 훼손하려는 이들의 행위는 법 이전에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내 편‘, ’네 편‘을 나누기에 앞서우리 모두 각자의 단순한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영화 <타인의 삶>을 감상하고, 브레히트의 시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감흥을 느꼈더라면? 그랬다면 꿈에서조차 그런 일을 획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단순한 즐거움들로 삶을 채운다.


한 겨울 코코아 한잔,

다정한 사람의 웃는 얼굴

아이들의 노는 소리

책 페이지 감촉

포근한 이불의 촉감

비 오는 날 엄마표 김치전 냄새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로 토닥이는 라디오 오프닝..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해 준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서로에 대한 공감이 밑바탕에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즐거움을 빼앗지 않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공통된 인간성을 인정할 때, 우리의 일상은 지속될 수 있다.


단순한 즐거움이 지켜지는 세상만큼은 결코 내어줄 수 없다


즐거움이란 어떠한 변호도 필요 없다.

-브레히트


표지사진: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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