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훌륭한 삶이란_버트란트 러셀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고무되고 지식으로 인도되는 삶이다.
The good life is one inspired by love and guided by knowledge.
지식과 사랑은 둘 다 무한히 확대되는 성질을 지녔다.
Knowledge and love are both indefintely extensible;
그러므로 어떤 삶이 얼마나 훌륭하든 간에, 그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Therefore, however good a life may be, a better life can be imagined.
지식 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지식도 훌륭한 삶을 낳을 수 없다.
Neither love without knowledge, nor knowledge without love can produce a good life.
중세 시대에는 어떤 지방에 페스트가 돌면 성직자들은 그곳 주민에게 교회에 모여 악령을 쫓아내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 결과, 간청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 사이에 전염병이 엄청난 속도로 퍼졌다. 이것은 지식 없는 사랑의 일례이다. 지난 세계 대전의 경우는 사랑 없는 지식의 표본이 되었다. 어느 경우든 결과는 대규모의 죽음이었다.
사랑과 지식 두 가지 모두 필수적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이 좀 더 근본적이다. 사랑은 지성인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방법을 찾아낼 목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적이지 못하면 들은 대로 믿어버리는 태도에 머물게 되어 진실한 자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를 끼치지 쉽다.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가장 좋은 예는 아마도 의학일 것이다. 유능한 의사는 환자에게 있어 가장 헌신적인 친구보다도 유용한 존재이며, 의학 지식의 발전은 공중 보건을 위해 무지한 박애 행위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발견들로 부자들만 해택을 받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여기에도 자비라는 요소가 필수적이다.
사랑은 다양한 감정들을 망라하는 단어이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포함시키고 싶어서 일부러 이 단어를 쓰고 있다. 감정으로서의 사랑,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이다. ‘원칙에 입각한’ 사랑이란 것은 내게는 진실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감정으로서의 사랑은 두 객의 극단사이에서 움직인다. 즉, 관조에서 오는 순수한 기쁨이 그 하나이고 순수한 자비심이 나머지 하나이다. 무생물이 관심의 대상인 경우에는 기쁨만이 일어난다. 경치나 소나타 곡에 대해서는 자비심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유형의 즐거움이 예술의 원천일 것이다. 이런 즐거움은 일반적으로 성인들보다 어린아이들에게서 더 강하다. 어른들은 사물을 실용적인 태도로 보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우리가 단순히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보자면 매력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에서 큰 역할을 한다.
사랑의 이러한 극단과 정반대 쪽에 있는 것이 순수한 자비다. 자기 생명을 희생해 가며 나병 환자를 돕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경우, 그들이 느꼈던 사랑에는 미적기쁨이라는 요소가 들어갈 수 없다. 부모의 애정에는 일반적으로 아이의 모습에서 느끼는 기쁨이 동반되지만 이 요소가 전혀 없어도 여전히 강하게 지속된다.
(중략)
기쁨과 타인의 행복을 비는 마음, 이 두 가지 요소의 불가분한 결합이 최고조의 사랑이다.
-버트란트 러셀 (Bertland Russel), 1925년 저작 ‘What I believe’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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