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레드포드를 추억하며
경주와 부산 출장을 연달아 다녀오니, 어느새 9월의 끝자락에 와 있었다.
천년의 고도 경주에서는 <국제 경주 역사문화 포럼>통역 을 맡았고, 이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제작자와 감독, 배우들 사이에서 영화의 언어를 이어주고 돌아왔다
그 바쁜 나날들 사이, 좋아하는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폴 뉴먼과 함께 내 평생의 이상형으로 꼽아온 배우다. 뒤늦게나마 그를 추억하고 싶어졌다.
레드포드가 남긴 영화들은 파노라마처럼 내 눈앞을 스쳐간다. <내일을 향해 쏴라>와 <스팅>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명작이다.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의 자유분방한 카우보이의 눈빛, <스팅>에서의 재치와 여유는 그를 ‘황금빛’ 배우로 각인시켰다. 한편, 젊고 매혹적인 유부녀 데미 무어를 돈으로 유혹하는 <은밀한 유혹>에서는, 다른 배우였다면 지나치게 ‘느끼’했을 그 역할을 레드포드 특유의 카리스마와 단정한 기품으로 소화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립의 머리를 감겨주던 아름다운 장면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잘생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정한 매력이 가장 빛났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1973년작 추억(The Way We Were)이다. 레드포드는 이미 할리우드의 ‘Golden Boy’라 불릴 만큼 금발과 푸른 눈, 균형 잡힌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외모 과시가 아니었다. 차분하고 절제된 표정, 말보다 눈빛으로 감정을 전하는 연기로 ‘조용한 카리스마’를 드러냈다.
그가 연기한 허블은 안락한 체제 안에서 살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케이티의 불타는 열정에 끌리는 인물이었다. 케이티가 뜨겁게 달려올 때, 허블은 여유와 무심함 속에서 그녀를 감싸 안는 듯 보이지만, 끝내는 '그 세계에 끝까지 함께 들어갈 수 없는 남자'라는 거리를 유지한다. 부드러움과 거리감이 공존하는 이중성은 오히려 관객들에게 더 큰 매혹으로 다가왔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한 이 영화에서, 하얗고 긴 그녀의 손길이 지그시 눈을 감은 레드포드의 얼굴을 스치는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 순간, 로버트 레드포드의 얼굴은 단순히 완벽 미남이 아니라, 대사 한마디 없이도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남자의 얼굴로 살아났다.
Barbra Streisand - The Way We Were - YouTube
사실 레드포드에 이끌려 보게 된 영화였지만, 보고 난 뒤에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연기한 ‘케이티’라는 인물에게 더 매혹되었다. 주관이 뚜렷하고, 불의에 맞서고, 신념을 굽히지 않는 여성. 영화 내내 레드포드의 허블이 체제 안에서의 '세련된 안락함'을 상징한다면, 케이티는 '끝내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신념'을 대변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에 끌려 사랑했지만, 결국 바로 그 다름 때문에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허블은 안온한 삶을 지키고 싶었고, 케이티는 세상의 불의와 싸움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랑은 그 간극을 잠시 메웠을 뿐, 끝내는 그들 사이의 균열을 더 깊게 드러냈다.
영화의 마지막, 두 사람은 헤어지고 한참이 흐른 뒤 뉴욕 플라자 호텔 앞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친다. 케이티는 여전히 거리에서 반전·핵무기 반대 시위 전단지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두 사람, 케이티는 다시 한번 레드포드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누군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는 건, 말보다 더 깊은 사랑의 제스처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말한다.
“Your girl is pretty.”
그 짧은 대사가 참 묵직하다. 케이티는 여전히 허블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이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것임을 인정한다. 동시에, 허블이 택한 새로운 삶과 현재의 아내에 대한 존중을 담담히 전한다. 단순한 칭찬 같지만,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과거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마지막 언어다.
사랑은 끝났지만, 사랑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그 장면은 이후 <Sex and the City>에서도 오마주 되었을 만큼, 사랑 영화의 정수로 남았다.
나 역시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묘한 울림을 느낀다.
우리가 끝내 붙잡을 수 없는 것들, 그러나 결코 지워지지 않는 순간들.
그것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따뜻하게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레드포드는 이제 부재하지만, 그의 영화 속 얼굴과 눈빛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다.
그리고 속삭이듯 일러준다.
지금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쓰다듬는 이 찰나 또한, 언젠가 먼 훗날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 피어오를 추억이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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