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토지> 박경리 선생님의 서문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한 분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박경리 선생님을 떠올린다.
학부 졸업 논문도 선생님의 작품을 주제로 썼다.
대작 <토지>에 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해마다 몇 번씩, 선생님의 서문을 꺼내 읽는다.
그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삶이란 얼마나 아름답고도 애잔한 것인지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11월이 꼭 그렇다. 아름다움 속에 애잔함이 스며 있는 계절.
명예와 이익, 명리(名利)를 좇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세상에서 나도 모르게 그 흐름에 휩쓸릴 때면,
박경리 선생님의 끝까지 자신을 지켜낸 단단한 고집이 나를 멈춰 세운다.
결국은 모두 스러질 인생, 그 속에서도 무엇이 진짜 중요한가를 일깨워주시는 분.
그래서 나에게 박경리 선생님은, 언제나 마음의 스승으로 남아 있다.
서문
<토지>제1부를 [현대문학]지에 연재 중이던 1971년 8월, 암이라는 진단에 의해 수술을 받은 일이 있다. 수술 전날 병실 창가에서 동대문 쪽으로부터 남산까지 길게 걸린 무지개를 보았다. 참 긴 무지개였었다. 아마 나를 데려가나 보다. 하고 나는 혼자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날 회진 온 의사에게 물었다. 수술은 몇 시간이 걸리느냐고. 세 시간쯤 걸린다는 대답이었다. 대수술이군요. 하고 뇌었다. 삶에 보복을 끝낸 것처럼 평온한 마음이었다. 휴식으로 들어가는 기분이기도 했다. 야릇한 쾌감 비슷한 것도 있었다.
정작 죽음의 공포, 암이라는 병에 대한 불안은 가을, 회복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언덕길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가고 시장바구니를 든 주부가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세상은, 모든 생명, 나뭇잎을 흔들어주는 바람까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 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 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매를 쓰고 나서 악착스러운 나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氷壁 )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마지막 시각까지 나 스스로는 포기하지 않으리.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가시덤불의 길일지라도.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 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名利)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혹은 잡사(雜事)에서 손을 떼고 전념하는 것을 두고 한말인지 모르겠다. 그들 각도에서 본 행, 불행에는 각기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론 노여움을, 때론 모멸감을 느끼며 그런 말을 듣곤 한다.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무궁무진한 인생의 심층을 상식으로 가려버리려는 짓이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 그렇게 가치 지어지는 행복이라면 실상 그 어느 것과도 나와는 별 인연이 있을 성싶지 않다.
1973년 6월 3일 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찰나 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1993년 6월 8일
그해, 그러니까 토지를 끝낸 1994년 8월 15일, 그때도 나는 해방감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멍청히 앉아 있었다.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고 막막했던 길 위해서, 폭풍이 몰고 간 세월이 끔찍하여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토지>의 운명도 기구했다. 25년 동안 여러 지면을 전전했고 4부까지 출간되었으나 3년 동안 출판 정지, 절필한 일이 있었다. 완간이 된 뒤에도 출판 계약이 끝나면서 3년간 책을 내지 않고 애써 외면했다. 작품이 나간 이상 독자에게는 읽을 권리가 있고 이미 작가 손에서 떠난 거라며, 꾸지람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에 속하고 편협한 나로서는 문학작품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의 추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인과 작가의 차이는 무엇이며 기술자와 작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차이가 없다면 결국 문학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의미를 상실한 문학, 맹목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삶,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책이 다시 나가게 되니 마음은 석연찮다. 자기 연민이랄까. 자조적이며 투항한 패잔병 같은 비애를 느낀다.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
얼마 전에 하동 평사리에 최참판댁을 복원해 놓고 <토지문학제>라는 행사가 있었다. (중략) 해거름의 행사장에서 몸과 마음이 얼어버린 나는 자동인형처럼 연단으로 올라갔다. 지리산의 한(恨)에 대하여 겨우 입을 열었다. 오랜 옛적부터 지리산은 사람들의 한과 슬픔을 함께 해왔으며, 핍박받고 가난하고 쫓기는 사람, 각기 사연을 안고 숨어드는 생명들을 산은 넓은 품으로 싸안았고 동족상쟁으로 피 흐르던 곳, 하며 횡설수설하는데 별안간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 내 안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세월이 아우성치며 달려드는 것 같았다. 둑이 터져서 온갖 일들이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아아 이제야 알겠구나 <토지>를 쓴 연유를 알겠구나 마음속으로 울부짖으며 나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중략) 전신이 떨렸다. 30년이 지난 뒤에 작품의 현장에서 나는 비로소 <토지>를 실감했다. 서러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이었다.
고난의 역정을 밟고 가는 수없는 무리.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면 이상향을 꿈꾸고 지향하며 가는 것 또한 우리네 삶의 갈망이다. 그리고 진실이다.
다만 죄스러움이 가끔 마른침 삼키듯 마음 바닥에 떨어지곤 한다. 필시 관광용이 될 최참판댁 때문인데 도 하나, 지리산에 누를 끼친 것이 아닐까. 지리산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 의해 신음하고 상처투성이다.
어디 지리산일 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 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가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2001년 12월 3일 박경리
표지 사진: Unsplash의Johannes Plen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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