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하는 일이 쉬워 보인다면

직접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무게와 숙련

by 루이보스J

부스 안에서 통역을 하다 보면 무대 위 사회자가 참 편해 보일 때가 있다. 통역사들은 머리를 쥐어짜며 두 언어 사이를 실시간으로 오가는데, 진행자는 조명을 받으며 준비된 문장을 또렷하게 읽어 내려가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옷 잘 차려입고, 웃으면서 목소리만 크게 내면 모든 게 술술 풀릴 것만 같아 보인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그 일의 진짜 무게를 가늠할 수 없다.


이번 경주 APEC 부대행사에서는 뜻밖에 사회를 맡게 되었다. 일을 제안받은 친구가 다른 일정과 겹치면서 내가 대신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사회자 역할도 겸한 일이었다. (의미있는 일 챙겨준 사랑하는 친구야 늘 고마워!!) 짧은 행사라 흔쾌히 수락했지만, 막상 일정이 다가오자 사회 역할 때문에 부담이 밀려왔다.


다행히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었다. 친분이 있는 베테랑 아나운서 손정은님 :)

전 MBC 현재 프리랜서 손정은 아나운서

그녀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페이스 타임으로 심야에 한 시간씩이나 꼼꼼하게 코칭을 해주었다.

원래도 참 다정한 사람인데 그 세심함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여러 번 반복했다.
“진심으로.”


“귀한 발걸음 해주신 내빈들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말하세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정말이지 그녀가 말하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는 그냥 인사말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제야 알았다. 사회자는 단어를 읽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증폭시키는 공명판이라는 것을.

그들의 에너지는 공기를 타고 청중의 마음까지 닿아야한다는 것을.


그녀는 덧붙였다.

-스크립트에 숨을 불어넣어 종이 위 문장을 살아있는 언어로 바꿀 것

-이름은 절대 틀리지 말 것 (한 사람의 이름은 그의 존재 전부)

-부드럽되 당당하게 중심을 잃지 말 것

-변수를 예측하되, 통제 불가능함을 받아들일 것


행사 당일, 역시나 스크립트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내빈 명단이 바뀌고,

순서가 엉켰고,

즉석 발언이 이어졌다.


내 안에서 정은님의 목소리가 울렸다.


“진심으로. 부드럽게. 당당하게..”


행사는 무사히 끝났고, 주최 측은 만족했다.

행사 마치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경주를 상징하는 예쁜 다과


타인의 일이 쉬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충분히 숙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랜 시간 자신의 서투름을 지워왔기 때문이다.


숙련이란 기술의 축적이 아니라, 고통의 소화다. 넘어짐이 근육이 되고, 실수의 기억이 반사신경이 되며,
당황의 경험이 침착함으로 변하는 과정말이다.


우리는 완성된 그림에 감탄하지만 쓰레기통에 구겨진 수백 장의 습작은 보지 못한다.


통역 부스 안에서 나는 무대를 부러워했고,

무대 위에서는 부스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이제 안다.

모든 자리에는 그 자리의 무게가 있고,

모든 일에는 보이지 않는 층위가 있다는 것을.


타인의 일이 쉬워 보인다면,

그건 아직 그 일을 해보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당신의 일이 쉬워 보인다면,

그건 당신이 이미 충분히 숙련되었다는 증명이다.


표지 사진: UnsplashEmily Seveno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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