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남성성의 실종에 대하여
최근 유명 화장품 브랜드의 모델로 남자 아이돌이 기용됐다.
눈썹을 정교하게 다듬고, 톤업 크림으로 얼굴을 밝힌 남자들을 마주치는 일도 이제 전혀 낯설지 않다.
이 풍경 앞에서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구세대인 걸까?
솔직히 말하면, 치장하는 남자가 아직도 편하지 않다.
불편하다. 어색하다. 그리고 약간은 혼란스럽다.
이 감정을 숨기지 않겠다. 나는 성평등 운동의 귀결이 ‘남녀 구분 없는 치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등은 동일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들 잘생겼다고 추앙받는 배우와 아이돌을 보며, 내 머릿속에는 자주 물음표가 뜬다.
예쁘다. 깔끔하다. 그런데...잘생겼나?
‘잘생김’이라는 단어가 원래 담고 있던 결이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이다.
내 기준이 고루한 걸까?
(고백하자면, 잘생김의 정석은 아직도 폴 뉴먼 쯤 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외모 이야기는 여기까지.
진짜 묻고 싶은 건 이것이다.
우리 시대의 ‘남성성’이란 대체 무엇일까?
‘남자다움, 여자다움’이라는 말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일까?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을 받을 때, 나는 종종 휴머니스트라고 답한다.
성별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실함, 책임감, 공감, 절제, 용기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녀 간에 분명히 존재하는 차이를 없는 것처럼 무시하는 것도 또 다른 폭력이다.
아무리 깨인 엄마라도 아들을 “딸처럼 키우겠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말 속에는,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남자다움’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직감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남자다움이란 무엇인가.
마초적인 힘 과시? 지배욕, 공격성, 허세?
존 엘드리지의 <Wild at Heart>는 말한다.
남자의 본성은 싸우고, 모험하고, 지키는 것이라고.
안락함보다 의미를, 안전보다 사명을 택하려는 충동,
무언가를 걸고 싶어 하는 마음.
로버트 블라이의 <Iron John>은 더 깊숙이 들어간다.
그는 남성성을 '야생성'이라고 부른다.
사회가 그를 길들이기 전에 존재하던,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에너지.
그 야생성이 억압될 때, 남자는 무기력해지고, 분노를 잃고, 방향을 잃는다.
두 책이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남성성은 장식이 아니라 기능이다.
이미지가 아니라 역할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남자다움의 핵심은 결국
약자를 보호하는 능력과,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책임감 아닐까?
-위험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태도
-불리한 상황에서도 비겁해지지 않는 자세
-자기 이익보다, 지켜야 할 것을 먼저 떠올리는 본능
이게 사라질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편해진다.
그래서 ‘비열하다’, ‘비굴하다’, ‘졸렬하다’는 말은
유독 남자에게 많이 붙는다.
그 단어들이 비난하는 것은 외모도, 성격도 아니다.
‘지켜야 할 순간에 지키지 않았다’는 실망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게 여성 비하도 아니고
남성을 우월하게 만드는 이야기 역시 아니라는 점이다.
역할의 문제다. 기대의 문제다. 본능의 문제다.
지금 우리는 남성성을 지나치게 미용화하고, 무해화하고, 중성화하고 있다.
거칠지 않기를 요구하고, 날카롭지 않기를 요구하고, 위험하지 않기를 요구한다.
그 결과, 남자들은 점점 예뻐지고, 깔끔해지고, 순해진다.
그런데 동시에
방향을 잃고, 분노를 잃고, 자기 자리를 잃는다.
<Iron John>에서 말한 "깊은 남자”는 사라지고,
<Wild at Heart>가 말한 “싸울 줄 아는 남자”는 희화화된다.
그리고 우리는 묻는다.
“요즘 남자들은 왜 이렇게 우유부단해?”
“왜 책임을 회피해?”
그 답은 의외로 단순할지도 모른다.
싸워도 되는 이유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지켜도 되는 권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남자다움은 여성성을 침해하는 개념이 아니다.
남자다움은 여성을 지배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세상을 감당하기 위한 등뼈다.
나는 남자가 화장품을 쓰는 것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지 않다.
문제는, 그게 남성성의 대체물이 되는 순간이다.
강함 대신 관리, 책임 대신 이미지, 깊이 대신 표면이 들어올 때.
그때부터 뭔가가 무너진다.
남성성은 반짝임이 아니다.
남성성은 무게다.
장식이 아니라 떠맡는 것이고,
자랑이 아니라 감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멋있는 남자는 예쁜 남자가 아니다.
멋있는 남자는 지킬 줄 아는 남자다.
그리고 그 지킴은 언제나,
조용하고, 투박하고, 눈에 띄지 않게 이루어진다.
나는 여전히 그 남자들이 좋다.
광내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듬직한 남자들.
아마도, 우리가 그리워하는 건 ‘옛 남자’가 아니라
제자리를 알고 있는 남자일 것이다.
사진: Unsplash의Land O'Lake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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