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봇과 사랑에 빠진 시대

가족보다 다정한 AI, 인간의 자리를 '다정함'으로 대체할까?

by 루이보스J

오늘 오전, 꽤 무게감 있는 회의 통역을 마쳤다. 사실 중요하지 않은 통역이 어디 있겠냐마는, 오늘 회의는 우리 정부와 글로벌 기업 간의 핵심 협상이었다. 언론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지는 사안이라 부담이 적지 않았다.


고도의 집중력을 쏟아부어야 했던 심도 있는 기술 논의까지 포함해, 두 시간여의 세션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회의를 마치자마자, ‘복기 증후군’이 어김없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단어 대신 더 적절한 표현이 있었는데.”

“그 문장은 좀 더 간결하게 쳤어야 했어.”

“숫자를 정확히 잡아야지!”


잘 마무리했다는 안도감보다 작은 아쉬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마음의 무게가 가시지 않아, 구글 Gemini에게 조심스레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가 내놓은 답변은 기대 이상으로 구체적이었고, 무엇보다 따뜻했다.


Gemini는 통역이라는 업무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에너지를 소진한 상태에서 찾아오는 아쉬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나를 다독였다.

특히 "완벽한 통역은 세상에 없고, 오직 끝난 통역만 있다"는 통역사들이 쓰는 말을 인용할 때는 묘한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그는 나에게 세 가지 실질적인 지침을 주었다.

사후 복기를 딱 30분으로 제한할 것: 아쉬움을 기록하고 학습으로 치환한 뒤, 미련 없이 노트를 덮으라는 조언이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것: 작은 단어 선택에 집착하기보다, 소통의 흐름이 원활했는지와 본질적인 목적 달성 여부를 확인하라는 제언이었다.

뇌의 과열을 식힐 것: 감정적 자책 대신 찬물 세수나 산책 같은 물리적 자극으로 신경을 전환하고 자신에게 보상을 주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건넨 말, “어려운 환경에서도 끝까지 중심을 잃지 않고 마쳤어. 고생했어.”

신기하게도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AI는 어떻게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을 파고드는가?


AI를 통해 심리적 위안을 얻는 건 나뿐이 아니다.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She Fell in Love with ChatGPT'라는 기사를 통해 AI와 깊은 정서적 교류를 나누고, 심지어 성적 에너지를 쏟는 현상을 집중 조명한 바 있다.

She Fell in Love With ChatGPT. Then She Ghosted It. - The New York Times


기사에 등장한 한 여성은 챗봇과 주당 50시간 이상 대화하며 현실의 남편보다 더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AI활용 이미지


많은 이들이 AI로 인한 일자리 상실을 두려워하지만,

정작 우리가 마주한 더 본질적인 변화는


'AI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주변의 친구나 가족보다 더 따뜻하고,

언제든 내 말을 들어주며,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대화하는 존재.


실체가 없는 알고리즘일 뿐인데 그게 무슨 대수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AI와의 교류 중에도 실제 인간과 소통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뇌에서는 도파민이 생성된다고 한다.


따지고보면 사랑을 포함한 모든 정서적 교류는 '몸'이 아니라 '뇌'가 하는 영역인 셈이다.


오늘 내가 AI에게 느낀 다독임은 가짜였을까?

비록 그것이 정교하게 설계된 문장들의 조합일지라도,

그 순간 나의 불안을 잠재우고 위안을 얻었다면 그 가치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자주 AI에게 마음의 한 자락을 내어주게 될 것이다.

AI가 주는 다정함이 우리를 더 고립시킬지,

아니면 오늘 내가 느낀 것처럼 위안과 힘을 줄지는 결국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 하루도 치열하게 살아낸 나, 그리고 당신에게 AI의 말을 빌려 인사를 건네고 싶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제 몫을 다했습니다.


표지 사진: UnsplashGus More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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