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은 '담겨 있고' 성의는 '표시한다'
정성에는 의도가 없지만 성의에는 의도가 있다.
정성은 저절로 우러나는 지극함이고, 성의는 예를 갖추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그래서 정성은 '담겨 있다'고 말해지고, 성의는 '표시한다'고 말해진다.
정성 어린 선물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서로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주고, 그냥 받는다.
선물이란 물건이 아니라 애정을 건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면 성의가 담긴 선물은 판단을 불러온다. 이 정도면 됐는지, 부족하진 않은지,
이 성의를 봐서라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이지 않는 의무와 기대가 함께 따라온다.
정성은 내키지 않으면 결코 구현할 수 없지만, 성의는 내키지 않아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
— 김소연, 〈마음 사전〉 중에서
오늘 지인들과 선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명품 주얼리, 시계, 가방, 옷들이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다. 남편에게 그런 값비싼 선물을 받았다는 이야기들. 나는 '부럽다'며 사회적으로 무난한 리액션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많이 부럽지는 않았다. 값비싼 물건으로 내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도 크지 않고, 그 돈이면 나는 차라리 남미행 비행기 표를 끊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 감정에 더 가까운 말은 부러움이 아니라 씁쓸함이었다.
부부간에 서로를 향한 '정성'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나는 소박한 연인이었다.
서로에게 값비싼 선물을 주고받은 적도 없고,
데이트라 해봐야 카페에 앉아 각자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선물들을 주었다.
-신촌 기차역까지 헐레벌떡 달려와 건넨 장미,
내가 아직도 그보다 더 아름다운 장미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하게 만든 커다란 꽃망울의 장미 한 송이.
-내가 좋아하던 기타 연주곡 〈카바티나〉를 전화기 너머로 연주해주던 밤.
-엽서 열 장에 걸쳐 나를 향한 시를 써서 한 장 한 장 건네던 마음.
그 어떤 것도 '선물답게' 포장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정성이 담겨 있었다.
나를 기쁘게 하고 싶다는, 아주 단순하고도 분명한 열의.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내게 선물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궁리한 시간들.
무엇을 줄까 고민하고, 어디서 구할까 찾아다니고, 어떻게 전할까 망설인 그 모든 시간.
그가 선물로 건넨 것은 바로 그 시간이었다.
(그는 내가 했던 선물들을 기억이나 할까?)
문득 생각한다.
서로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이 마음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
노력의 문제일까,
사랑의 문제일까.
아마도 답은,
상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계산하기 이전에,
상대를 얼마나 오래, 깊이 바라보고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
정성은 특별한 날에만 꺼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날들 속에서 조용히 쌓여가는 것이다.
그래서 선물은 늘 관계의 상태를 드러낸다.
무엇을 받았느냐보다 어떤 마음이 담겨 있었느냐가 더 또렷하게 남는다.
관계가 힘들어지는 순간은
어쩌면 정성이 줄어들어서라기보다
성의로 충분하다고 서로를 설득하기 시작할 때인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선물을 고를 때 '이게 괜찮을까'를 먼저 묻지 않는다.
대신 '이 사람을 떠올리느라 내가 얼마나 시간을 썼는가'를 돌아본다.
정성은 늘 비효율적이다.
쓸데없이 오래 생각하게 만들고,
괜히 한 번 더 돌아가게 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감수하게 한다.
그래서 귀하다.
정성은 여전히 시간이 남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남겨두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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