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인생에서 어쩔 수 있는 유일한 것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 없다>와 다산 정약용

by 루이보스J

뒤늦게 본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 없다>는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완성도는 차치하더라도 재미도 없다니..ㅠㅠ), 한 장면만큼은 강렬했다.

"문제가 뭔 줄 알아? 당신이 실직한 게 아니야.“


“문제는 실직당하고 나서 당신이 그 시간을, 그 현실을 대했던 방식이야."


염혜란 배우가 연기한 아내가 실직한 남편(이성민)에게 총을 겨누며 뱉어내는 서늘한 대사다.


이 대사는 '어쩔 수 없는 상황' 그 자체보다, 그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은 종종 예측 불가능한 거대한 파도를 몰고 온다. 코로나 팬데믹, 갑작스러운 해고, 불운한 사건 사고들 혹은 인간 관계에서 오는 온갖 불협화음끼지. 우리는 그 파도 앞에서 "어쩔 수 없었어"라는 말을 방패 삼아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 염혜란의 대사는 뼈아프게 묻는다. '상황'은 네 잘못이 아닐지언정, 그 '상황을 대하는 방식'은 온전히 너의 선택이 아니었냐고.

이 지점에서 200년 전 조선의 한 인물이 오버랩된다. 조선 후기의 위대한 학자, 다산 정약용. 그가 겪었던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영화 속 남편의 실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과 사를 가르는 폭풍이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으로 몰리고 강진의 좁은 골방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인생의 황금기에 찾아온 18년의 ‘강제 중단’…이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이 있을까.


정약용에게도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말할 만한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정치적 모함, 순교당한 형제들과 가족들, 끊임없는 감시와 고립. 하지만 그는 그 상황을 대하는 자신의 '방식'을 선택했다.


1. 감옥을 실험실로 바꾸는 '태도'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스스로를 '죄인'이 아닌 '학자'로 재정의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좁은 주막집 방 한 칸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네 가지(생각, 용모, 언어, 동작)를 올바르게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누구도 보는 이 없는 유배지에서 그는 매일 아침 의관을 정제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외부의 상황은 통제 불능이었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가짐만큼은 철저히 통제 아래 두기로 한 것이다. 멘탈이 흔들릴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거창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진 내 주변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


2. 의지력을 믿지 않는 '시스템'

정약용의 위대함은 단순히 '정신승리'에 머물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인간의 나약한 의지력을 잘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방대한 지식을 정리하기 위해 제자들을 모아 '학단'이라는 일종의 협업 시스템을 구축했다. 자료를 분류하는 사람, 필사하는 사람, 교정하는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 지식의 공장을 돌린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날 정도로 몰입해 완성한 500여 권의 저서다. 상황이 나를 가두었을 때, 그는 그 안에서 자신만의 생산 시스템을 설계했다. 현대의 우리에게도 '시스템'이 필요하다. 의지에 기대어 "내일부터 열심히 해야지"라고 다짐하는 대신, 강제로 나를 움직이게 할 루틴과 환경을 설계하는 것, 그것이 다산이 보여준 '시스템의 힘'이다.


3. 분노를 창조적 에너지로 치환하기

정약용은 자신을 모함한 이들을 저주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그 분노를 '현실 개혁'의 동력으로 삼았다. 중앙 관직에서는 보지 못했던 백성들의 고통을 현장에서 목격하며, 그는 분노를 담아 <목민심서>를 썼다.


나쁜 상황은 종종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준다. 그 에너지를 나를 갉아먹는 데 쓸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쓸 것인가. 다산은 후자를 택했고, 2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를 유배객이 아닌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로 기억한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상황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시스템을 설계하자.


인생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과 없는 영역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때로 세상은 우리를 가장 원치 않는 곳에 데려다 놓기도 하고, 공들여 쌓은 탑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상황이 아무리 나빠져도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만큼은 늘 우리 몫으로 남겨져 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내가 취할 태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 선택이자 자유의 최후 보루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절망도 나를 완전히 장악할 수는 없다.


이 사실이 얼마나 희망적인가!


상황은 바꿀 수 없을지라도, 오늘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다산이 강진의 작은 방에서 그러했듯,


우리 각자의 '유배지' 또한 인생에서 가장 단단한 뿌리가 내리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표지사진: Unsplash_Pablo Heimpla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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