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형님이 돌아가시고, 그 해 겨울 큰 형님을 잃은 슬픔에 몸과 마음이 사그라지신 어머니마저 끝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이젠 내가 이 집안에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고, 이듬해 8월 해방이 되었다.
우리 스스로 찾지 못한 조국의 해방은 원하지도 않는 38선이 그어졌고, 남쪽은 미 군정이 북쪽은 소련군이 자리를 잡았다. 개성까진 38선 아래여서 넷째 형님이 계신 옹진군의 아래쪽은 남한이 되었다. 천만다행한 일이다. 자칫 하루아침에 생이별을 할 뻔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며 큰형수와 집안 어른들을 비롯해 누이, 그리고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넷째 큰 형님께 연통을 넣어봐야겠다. 일제 치하에 광산 일을 하시느라 건강이 악화되셨다는데 큰 형님과 어머니의 연이은 상을 치르고 집안을 건사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다. 넷째 형수도 큰형수와 비슷한 시기에 셋째 조카를 낳으셨는데도 보질 못했니 참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지낸 것이다.
해방이 되자마자 우리 집안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막내 형님에게로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방이 되고도 6개월이 지나도 막내 형님은 귀환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엔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터트렸는데, 그곳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곳이라고 했다. 그곳에 있던 우리 조선인들도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는데 혹시 그 난리 통에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며 그저 발만 동동거리며 기다릴 뿐이었다. 이럴 때 큰 형님이 계셨다면 어떻게든 막내 형님의 소식을 알아냈을 텐데 내겐 그런 힘과 지혜도 없다. 이럴진대 어찌 이 큰 집안의 식솔들을 거느릴 가장이라 할까 부끄럽고 안타까운 맘만 들뿐이다.
그렇게 해방이 된 해 겨울 끄트머리쯤 막내 형님은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셨다. 집을 떠날 땐 겁먹은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었는데 그간 키도 더 크시고 몸집도 더 커지셨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독기와 원망이 느껴져 그간 형님이 일본에서 겪었을 고충이 얼마나 컸는지 오롯이 전달되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형님은 아주 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원래 먹고사는 문제에 유독 관심이 많고, 돈에 있어서는 자린고비도 울고 갈 형님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형님은 그때의 형님과는 사뭇 다른 이가 되었다. 돈에 혈안이 되어 수단과 방법 따윈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특히 농지에 대한 집착이 컸는데 일본이 소유였던 토지를 사들이는데 큰 욕심을 부렸다. 일찍부터 농사일을 하셨던 이유도 있겠으나,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일본에서 당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온몸으로 느끼고 오신 형님께서 믿을 건 땅뿐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형님이 돌아오시고 일주일 후 어머니의 첫 기일이었다. 형님이 돌아와 어머님의 첫 기일을 함께 준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날 밤 제사상을 앞에 두고 형님과 나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간 큰 형님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네가 집안을 건사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
"제가 고생이라고 한 게 뭐 있나요. 일본에서 계셨던 형님이 고생 많았쥬. 근디 왜 이리 일찍 못 온 것이 어유."
"말도 마라. 내 여러 번 광산에서 탈출을 시도허다 목포까지 온 적도 있는디 그놈의 선주 놈 때문에 순사 놈한테 잡혀서 다시 일본에 돌아간 뒤로 무슨 비행장을 짓는다는 마을에 끌려갔었다. 그곳에서 나와 같은 조선인들이 맨손으로 흙을 퍼 나르며 비행장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란디 어느 때부턴가 미군 비행기가 낮이면 날마다 날아와서 공습을 하는 바람에 우리 조선인들이 죽은 이들이 많았다. 나도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그라고 해방이 되어 돌아올라고 하니 배를 타야 하지 않았겠냐? 사람들 말로 시모노세키에 가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배를 탈 수 있다 해서 걸어서 그곳까지 가는 데만 달포 넘게 걸렸다. 그곳에서 뱃삯을 마련하느라 부두가에서 막일을 했다. 패망한 일본인이 우리 조선인을 여전히 버러지 취급하며 일도 할라치면 안 주기에 난 시체 치우는 일도 했다. 그 덕분에 좀 더 일찍 돌아올 수 있었던 게야."
"시체까지 치우셨다고요. 에구 형님. 고생 많았유. "
"그나저나 큰 형님은 어찌 그리 허망히 가신 것이냐?"
"큰 형님은 우리보다 배운 것도 많으셔서 그런지 나라 걱정을 많이 했던 거 아시잖아요. 형님 징용 끌려가신 거 보시고 독립운동에 더 힘을 쏟으셔서 지가 형님 따라 만주까지 군자금 조달책으로 갔다 왔지 뭐 여유."
"만주까지? 집안 건사는 어찌하구?"
"어머님이랑 큰형수가 고생 많이 하셨지 유."
형님과 나는 달이 지고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이 들릴 때까지 계속 이어졌고, 해가 뜨기 직전 잠을 청했다.
나는 막내 형님과 어젯밤 대화 중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고 사나 하는 고민을 나누었다. 형님은 예상대로 농사일을 하겠다 하셨고, 난 그런 형님을 도와 세상일과는 등을 진채 2년을 농사일을 하며 지냈다. 내가 그리 보내는 동안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들어섰고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앞으로 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막강한 군대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대한민국 군 창설에 힘을 쏟아부었다.
그즈음에 동네 친구 윤(尹)가 가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한다며 나도 함께 하자고 권했다. 내가 배움이 짧고 막내 형님같이 농사일에 관심도 없으니 월급도 나오고 내 성격에도 맞을 것 같아 마음이 동요하였던 차였다. 며칠 후 윤가가 군 입대 원서를 넣으러 서울에 간다 하니 함께 따라가 좀 더 알아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삼 일 후 나는 윤가와 함께 서울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최가야, 니는 군인 되면 어디로 가고 싶은 겨?"
"아직 입대할지 안 할지 결정 안 했구먼. 웬 설레발이여."
"니 그리 말해두 제복 입은 군인들 보면 맘이 금세 달라질걸. 그라고 지금 나라 되찾고 나서 군대의 중요성이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월급 또박또박 주는 공무원이 되어야지. 안 그러면 먹고 살 방법이 없구먼. 그걸 아는겨? 모르는 겨? 장가도 가야 할 거 아녀?"
윤가 녀석이 하는 말이 맞는 말이지만, 돈 하나 보고 덜컥 군대에 가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삼 남매를 홀로 키우는 큰형수도 그렇고, 소박 맞고 집에 와 지내는 누님도 그렇고, 막내 형님의 농사일도 그렇고 뭐 하나 내가 집을 떠나는데 맘이 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도 이젠 이십 대의 중반이고, 가정을 꾸려야 하는데 밥벌이를 못하는 사내에게 누가 오겠나 싶어 지니 무얼 하더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은 앞섰다.
윤가 녀석은 연신 떠들어 대더니 곯아떨어져 코를 골며 잔다. 기차를 타니 큰 형님이 더욱 그립다. 마지막으로 함께 탔던 기차, 신의주에서의 하룻밤, 단동과 대련에서 있었던 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 잠이 든 나는 서울역에 기차가 도착해서야 깼다. 윤가 말로는 경무대 보초 서는 보직이 최고라는데 우리는 연줄도 없고 배움도 짧으니 38선 최전방에 배치되지 싶은데 아무 준비도 없이 올라온 나로선 윤가의 군 입대 절차를 우선 지켜볼 일이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나에겐 미군의 입김으로 징병제가 없어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윤가는 나보다 3개월을 먼저 입대를 했고, 나는 그 해 겨울에 어머니의 기일을 기리고 내 청춘을 바친 군에 입대를 했다. 그 해 겨울은 내게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