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 치우려는데 외가댁에서 사람이 왔다. 돌아가신 엄마의 남동생인 외삼촌이 보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아버지에게 외삼촌이 보낸 편지를 전해주고 돌아갔다. 난 편지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아버지의 안색을 보니 좋은 내용은 아닌 것 같아 조용히 배 서방 댁 아주머니를 도와 부엌에서 설거지를 했다.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줄곧 사랑채에서 나오지 않으셨고, 얼마나 지났을까 배 서방 아저씨가 사랑방으로 들어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론 우리 집에 발걸음도 않던 외삼촌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낸 데는 모종의 꿍꿍이가 있어서 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달리 세상 물정에 관심도 많고 잘 알았던 외삼촌은 죽은 누이의 자식들인 우리를 남 대하듯 했고 어쩌다 관심을 주는 때가 있다 싶으면 아버지로부터 필요한 용돈을 타가는 때뿐이었다. 아마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우리 집에 발도 못 부치게 했을 텐데 새엄마가 우리 집에 오고도 여러 차례 아버지께 돈을 받아 간 걸 보면 외삼촌이 수완이 좋거나 아버지가 호구이거나 둘 중에 하나일 거다. 잠시 있자니 배 서방 아저씨가 나왔다. 나는 곧바로 가서 외삼촌이 왜 온 지를 아저씨께 물었다. 아저씨는 난감해하며 자꾸 눈을 피한다. 그때 마침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순열아, 밖에 있으면 잠깐 들어오너라."
"네, 아부지."
나는 잰걸음으로 마루에 올라 사랑방에 들어갔다.
"순열이 너도 방금 누가 왔다 갔는지 알제?"
"네."
"외삼촌이 서울에서 큰일을 하러 간다고 헌다. 근디 큰일을 할라치믄 쪼매 돈이 필요하니 도왔다고 해서 내가 그러마 했다."
"아부지, 왜 만날 외삼촌은 아버지께 와서 손 벌린 대유?. 외갓집이 못 사는 것두 아니고, 엄마 돌아가신 뒤로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돈 필요헐 때만 찾아오는 게 꼴 보기 싫구먼유."
"니 맘 네 다 안다. 그런디 어쩌겄냐? 그래두 엄마 동생이니 엄마 생각해서라도 내가 도와줘야 하지 않겄냐?"
"아부지가 맨날 그렇게 무르게 하니깐 외삼촌이 그러지유. 뭔 큰일 헌다고 큰돈이 필요하간유?"
"니는 모르겄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군을 대대적으로 증감한다 허지 않냐? 지금 있는 군부대에서 더 좋은 곳으로 갈라치면 돈이 필요허다고 허드라."
"외삼촌이 좋은 데로 가는 거랑 우리 집이랑 뭔 상관인데 유?"
"아무래도 서울에서 높은 사람들 밑에서라도 일하는 일가가 있으면 힘든 일 있을 때 좋지 않겄냐. 다 어려울 때를 생각해 투자한다치고 니가 좀 이해하거라. 어젯밤 술을 과하게 마셨더니 피곤하구나. 좀 쉬어야겠다. 그만 나가보거라."
아버진 술 때문에 피곤한 건지 외삼촌 때문에 피곤한 건지 아니면 농지개혁 문제로 피곤한 건지 정말로 한숨이 발치까지 내려온 채로 고단해하셨다. 난 하는 수없이 사랑방을 나와 할머니가 계신 뒤채로 갔다. 할머니는 올해 들어 더 바깥출입을 안 하셔서 아버지와도 말씀을 안 나누신 지 꽤 되었고, 부엌 일도 손을 놓으시고 소일거리로 수만 놓으셨다. 그런데 그 일도 눈이 침침해지셔서 요즘엔 그냥 하늘만 보고 뒤란에 핀 꽃들만 보고 지내시는 날이 많아지셨다.
"할머니, 지 순열이어유. 안에 계시쥬?"
답이 없으시다. 안채로 와 배 서방 댁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할머니는 새벽같이 절에 가셨다고 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냐 물으니 엄마 기일이 얼마 안 남아서 치성드리러 가셨다고 한다.
'아, 그러고 보니 칠석이 열흘 뒤이니 엄마 기일이 열흘 남았다.'
할머니가 절에 다녀오시고 , 엄마의 기일에 아버지는 외삼촌을 위해 논을 일부 파셨다. 할아버지 때부터 마름 일을 했던 우리 집은 아버지 때에 이르러 농지개혁으로 그 지위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해방되던 해에 나라 전체 농가의 절반은 자기 땅이 없는 소작농이었다고 했다. 자기 땅만으로는 부족해 남의 땅까지 빌려 농사를 짓는 농가도 부지기수라 했다. 대다수 농민은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이들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독립된 나라의 앞날에 희망을 걸기는 어려웠다고 했다. 이에 따라 농지 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는데 좌익 세력은 지주의 토지를 대가 없이 몰수해 농민에게 공짜로 나눠 주자고 주장했다. 우익 세력은 농지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 집도 지주의 땅을 관리하는 마름 집이니 농지개혁을 하는 것이 이로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소작농의 편에 섰다. 그러자니 당장 아버지의 행보에 지주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요 며칠 아버지의 귀가가 늦어진 것이었다. 외삼촌은 아버지가 처한 상황을 알기나 하는지 철없이 땅을 팔아 큰돈을 해달라 조르고 있다. 어린 내가 봐도 한심하다. 하지만 일은 우는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지주와 관계가 껄끄러워진 아버지는 많은 농지를 잃었고 외삼촌에게 돈을 장만해 주느라 천석 지기 부럽지 않던 우리 집은 점점 가세가 기울어 갔다. 그리고 이듬해 외삼촌은 경무대(景武臺) 소속 군 생활을 했고, 6월에는 농지개혁법이 생겨 아버지는 평범한 자작농이 되었다. 그때부터 새엄마의 불평은 늘어만 갔고 우리 삼 남매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당장 소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에 있는 상급학교로 진학하기로 한 큰 동생 기만이의 미래는 불투명 해졌다. 난 그래서 결심했다. 내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정신줄을 꼭 잡고 있어야겠다고. 자꾸 힘이 없어진 할머니와 입지가 좁아진 아버지, 어린 두 남동생을 꼭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