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가는 나보다 3개월 일찍 병역검사를 받고 매형이 논을 팔아 마련해 준 돈으로 그렇게 바라던 경무대 소속 경비 부대에 배치되었다. 나는 그보다 늦은 3개월 후 병역검사를 받고 제3보병 사단 백골부대에 배치되었다. 애초에 편한 부대를 배정받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38선 최전선에 그것도 섬과 다름없는 옹진반도에 위치한 부대에 배치를 받고 나니 걱정이 앞섰다. 내가 가는 곳 옹진은 내 스스로 우선순위에 둔 곳이기는 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넷째 형님이 일하는 옹진 광산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전운이 감도는 옹진에서 형님이 광산 일을 계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 수 있었다.
1949년 9개월에 걸친 38도선 부근의 유격전은 언제 전쟁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 해 5월에는 김석원 이끄는 1사단이 38선을 넘어 송악산 부근을 공격했고, 6월에는 내가 있는 옹진반도에서 호림 유격대가 38도선을 넘어 침투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러한 침투와 도발은 북에서도 마찬가지로 남한 쪽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1949년 8월 은파산을 점령하고 있던 18 연대 소속 2개 중대가 북한의 공격으로 전멸한 일(은파산 전투)이 발생한다. 그때 보름간 우리 부대는 지원을 나갔었고, 그때 넷째 형님이 건강상의 이유로 이곳을 떠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 되었다. 나 역시 살아 돌아올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은파산 전투로 남한이 북쪽에 즉각적인 반격을 감행하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옹진에 병력을 증강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북의 김일성은 은파산 전투의 성과 이후 옹진 공략을 구상해 소련에 알렸고, 막다른 지역인 옹진반도를 넘어 해주와 개성을 장악 후 서울까지 점령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한 바람의 배경에는 소련의 차관과 스탈린의 동의, 그리고 마오쩌둥의 직접적 지원이 있었다. 반면 이승만정부는 남한이 도발하지 않았는데 공격받았을 경우에만,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따라서 전쟁은 소련군의 철수와 미군의 철수가 진행되는 시기에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1949년 초 이후에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 태풍의 중심에 바로 옹진반도가 있었고, 전쟁의 시작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날 밤 북쪽 아이들의 도발이 유난히 거슬려 잠을 설쳤다. 6월 9일부터 23일까지 유엔 한국위원단 군사 감시관들은 9일간 38도선을 시찰을 마쳤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있는 옹진반도에는 6월 21일에서 23일까지 머물다 갔다. 미국의 관심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아닌 공산화된 중국이 언제 타이완을 침공하는가에만 있었다. 그러므로 유엔군사 감시관들에게는 전쟁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옹진반도 전투에 이어 은파산 전투 이후까지 이어지는 기간 옹진에 주둔하고 있는 대한민국 육군의 수는 백인엽 육군 보병 대령이 이끄는 제17 보병 연대, 제7 야전포병대대, 대전차 포 부대, 공병대와 경찰 공무원을 합해 겨우 3600여 명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인민군은 총 병력 15000여 명에 T-34 10여 대 및 자주포와 장갑차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병력 부족 상황에 때문에 백골단, 서북청년단, 대한 청년당 등이 통합된 향토방위대 등이 결성되었고, 2주간의 기초군사훈련만 받고 투입되어 보조 병력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조교가 되어 이들을 훈련시켰다. 6월 24일 밤늦게까지 대남 방송으로 시끄럽게 하던 인민군 애들 때문에 오랫동안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나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탄지말 부근에서 짙은 안갯속에서 붉은 조명탄(照明彈)이 터지며 허공을 가르는 것을 목격했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북쪽의 애들은 미리 준비라도 한 듯이 38선 이남으로 무차별적으로 화포를 쏘아댔다. 그들의 정확한 포격으로 우리 쪽 유무선은 모두 절단되고, 비처럼 쏟아지는 화포에 우리 진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으로 밀고 들어오는 북쪽 애들의 함성이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포격이 있은 후 곧바로 상부 부대에 보고를 했으나, 경계를 강화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전쟁이 났음을 직감하지 못한 지휘관은 혼란을 더 키웠다. 난 그때 판단했다. 이것은 그동안 있어왔던 작은 국지전이 아니었음을. 북쪽 애들은 너무도 정확히 우리 진지의 위치를 알았고, 그곳을 포격하여 우리를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향토방위대를 주축으로 소총과 기관총을 챙겨 전투에 임했다. 이제는 연대 없이 독자적으로 싸워야 했다. 2주밖에 안 되는 훈련을 받은 향토방위대는 오합지졸이어서 화포의 굉음에 놀라 총을 제대로 쏘지 못하는 일들이 부지기수였다. 무선도 끊어진 상태에서 교전을 할 수 없었기에 그저 죽지 않고 버티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북쪽 애들과 교전이 계속될수록 우리 쪽에서 죽어나가는 수가 많아졌다. 두락산과 토끼 고지의 상황도 마찬가지일 것은 명약관화일 테고,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2시간의 교전 동안 우리는 많은 수의 동료를 잃었다. 여름이어서 해가 일찍 뜨니 주변이 환해졌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렇게 백병전으로 버티니 한줄기 희망이 보였다. 인민군에 둘러싸인 우리를 지원하러 2대대가 왔던 것이다. 17 연대의 지원으로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그 뒤의 후속 작전이 없었고 뒤늦게 철수 작전이 내려졌지만 구체적인 방법 또한 부재했다. 게다가 우리 병력은 향토대 위주로 꾸려진 부대여서 분산 철수를 감행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바람에 사상자 이외에도 이탈자가 생겨났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시에 맞닥뜨렸을 때 보이는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