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속(還俗) 2

by 자강



발우(鉢盂) 공양을 한 후 기만이와 나는 잠을 자러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기만이가 전쟁이 나고 인민군을 피해 이 암자로 온 지 삼 년이 넘었으니 부처님에게 귀속한 지 삼 년이 다 된 셈이다. 내가 이리 생각하는 이유는 기만인 그전부터 출가를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내비치곤 했기 때문이다. 자리를 펴고 나란히 누워 있자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기만아"

"응"

"누나가 미안혀, 엄마 돌아가시고부터 너도 힘들었을 텐디 나 힘든 것만 생각했어. 새엄마가 들어와서 성훈이 옥희만 감싸돌고 하니까 어떻게 하면 새엄마를 이겨낼까 골몰하느라 정작 너와 기창이를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것 같어."

"그게 워디 누나 잘못이여. 새엄마 말만 듣고 우린 생각도 않는 아부지 탓이지."

"그리 생각 말어. 아부지도 처지가 딱하게 됐어. 너 이곳으로 오고 나서 곧바로 동네에서 인민재판이다 뭐다 해서 아부지는 공개 비판당하고 위신이 떨어질 대로 떨어지신 데다가 그때 받은 충격으로 몸소 누우신 지 2년이 넘었어. 멀리 있는 너한테까지 소식 전하기 뭐 해서 그냥 둔 거고. 널 너무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게 한 것도 다 내 잘못 같어."

"뭐여? 아부지 그래서 지금은 괜찮으신 겨?"

"응, 너 데리러 간다고 한 말 들으신 뒤부터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마실도 다니시고 그랬어."

"할머니랑 기창이는 어찌 지내는 감?"

"할머니는 엄마 제삿날에 이모할머니 절에 가신 후로 그곳에서 계신 지 두어 달 됐고, 기창인 학교 잘 다니고 있어. 삼촌 따라 서울로 가고 싶어 하는 눈치여."

"새엄마 등쌀에 그 집에서 온전히 살고 싶어 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어? 삼촌 말마따나 갑오경장 지난 지 언젠디 사서삼경이나 읽고 공부하라는 아버지는 너무 구식이여. 노스케말이든 미국말이든 배워 놨으면 얼마나 좋았겄어. 헌디 다 부질없어. 난 여기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부처님 말씀이 맞다는 걸 알았제."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기만인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듯했다. 그러니 이 누이의 말이 귀에 들리려나 고단함이 밀려와 나누던 이야기를 멈추고 잠을 청했다. 누가 기만이 좀 말려주소라고 꿈속에서라도 빌어본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니 기만이는 자리에 없었고, 자고 난 요와 이불만 말끔하게 개어 반닫이 위해 올려져 있었다. 나는 서둘러 자고 난 자리를 정리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아침 해는 벌써 세수를 한 말간 얼굴을 하고 떠 있다. 난 기만이를 찾아 암자를 한 바퀴 돌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삼촌도 없고 삼촌 친구도 없다. 새벽같이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수상쩍다. 아침 햇살이 바다 위에 윤슬이 되어 빛난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암자로 들어오는 입구 솔밭 쪽에서 새 사내가 걸어온다. 기만이, 외삼촌,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는 이. 이렇게 셋이서 작당 모의를 한 것처럼 비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이쯤 되니 그들이 나눈 대화가 궁금해져 나는 경망스럽게 뛰어가 삼촌에게 어딜 다녀왔는지 물었다.

"아니 새벽부터 어딜 다녀와요. 한참 찾았잖아유."

"왜 니만 버리고 갔을까 그란 겨? 사내들끼리 할 얘기도 있구. 절 아랫마을도 구경하고 했는디 뭔 호들갑이냐."

"미리 말씀 허구 가야쥬."

"에고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자고 있는디 어찌 말 허고 간다냐. 어여 밥 먹고 집에 가자. 기만이도 같이 갈 거니께 그리 알고."

"진짜로요? 기만아, 니 집에 진짜 가는 겨?"

그렇게 세 사내는 껄껄 웃으며 암자 마당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기만이가 웃는다. 저 아이가 저리 호탕하게 웃는 걸 난생처음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겠다고까지 하다니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어젯밤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나눌 때조차도 미동도 안 하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들어 맘을 바꾼 것인지 사뭇 궁금했다. 기만이를 다그쳐 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보살님이 아침 공양 차리는 소리가 분주해 황급히 부엌으로 가야 했고 내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들로 어지러웠다.

아침 공양 발우를 끝내고 기만이는 환속 절차를 밟고 짐을 꾸렸다.

"기만아, 니 참말로 집에 가는 겨?"

"잉."

"어째 어젯밤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드니만 어떻게 그리 생각을 바꾼 겨? 누나한테 먼저 말해 줬어야지. 밤새 걱정했잖어."

"내도 고민 많았구먼 헌디 삼촌이랑 삼촌 친구 말 듣고 맘을 굳힌 거여."

"뭐여? 뭔 말을 듣고 그런 건지 궁금하단 말여. 빨랑 얘기 좀 해 봐."

"그런 게 있어. 기냥 귀찮게 허지 말고 누나도 채비 허여. 집에 가야지."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피붙이인 나한테는 말도 안 허던 녀석이 도대체 뭔 말 때문에 맘을 바꾼 건지 궁금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나는 짐을 싸는 기만이에겐 얘기를 듣기 어렵다 생각하고 삼촌이 있는 마당으로 나갔다.

"삼촌, 기만이한테 뭔 말해서 맘을 돌렸유?"

"너도 궁금허냐? 내도 궁금해서 시방 그 얘기 듣고 있다."

"아니 삼촌도 모르면 누가 알어유. 시방 저짝이 하는 말 듣고 기만이가 맘 바꾼다고 허는 거여유?"

"그렇지. 어디 기만이가 식구들헌테 지 속을 보이는 놈이냐? 오히려 남이 더 편할 수도 있는가 보제."

난 피붙이인 나나 삼촌이 아닌 생판 남인 사내의 말에 맘을 바꾼 기만이에게 서운함이 느껴져 그 사내를 잔뜩 흘겨보았다.

"워따 무서워 살겄냐. 어쨌거나 다 같이 집에 가게 되었응게 좋은 일 아니어 어서 서둘러 가자. 선주님 차 얻어 타고 갈라면 이러고 있으면 안 돼야."

살벌해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삼촌은 구렁이가 담 넘듯 자리를 피했고 사내는 어쩔 줄을 몰라하고 멍하니 서 있다.

"고마워 유. 그 짝 덕에 기만이 데려갈 수 있게 되었구먼 유."

나의 고마움을 전하는 말에 의외의 말을 들은 표정으로 삼촌 친구가 씩 웃는다. 우리가 그런 사이 기만이는 승복을 벗어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 나왔다.
가을이 깊어 해가 짧아진 날 때문이라도 서둘러야 했던 우리는 선주님의 새우젓 트럭에 몸을 싣고 삼촌의 차가 있는 포구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차에서 모두가 생각에 빠져 멀어져 가는 바다를 지긋이 바라볼 뿐이다. 나는 오늘 안으로 집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월, 금 연재